일명 조선여자학흥회라고도 한다. 1915년에 창설되었던 조선여자친목회의 후신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와 항상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다.
설립취지는 “조선여자의 교육 보급을 도모하며 상호의 친목에 있었다.” 로서, 회장은 최진상(崔眞相), 총무는 박명련(朴命連), 간사는 한연순(韓連順)·최영상(崔英相)·김량(金良)이며, 회원수는 30명이었다.
1913년 봄에 중진회원인 유영준(劉英俊)·황신덕(黃信德)·한소제(韓小濟) 등이 탈퇴하여 일시 활동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난 뒤에는 간부들만이 집회에 열석(列席)할 뿐 활동이 거의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4년 1월초『동아일보』에 「민족경륜(民族經綸)」이라는 사설이 게재되자 이것은 총독정치를 시인하는 것이라 하여 재일유학생들이 재동경조선인대회를 개최하고 이 논설을 취소하고 사죄를 요구하라는 11개단체 명의의 성토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여자학흥회도 그 가운데 한 단체로 참여,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이 학회는 일제의 요시찰단체로 항상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