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필사본. 이 사행은 1801년(순조 1) 순조 즉위 관련 사은사(謝恩使)로 정사 조상진(趙尙鎭), 부사 신헌(申憲), 서장관 신현(申絢) 등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보다 3일 후인 2월 15일 주자서(朱子書)의 좋은 판본을 구해 오라는 명을 받고 출발해 사행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해 6월 6일 귀국할 때까지 약 4개월간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의 문집 중의 하나인 『냉재서종(冷齋書種)』에 수록되어 있다. 일기 · 견문 등을 위주로 기록한 일반사행록과는 달리 중국학자들과 사회 · 사상 등에 관해 문답한 것을 주로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이 보다 11년 전, 즉 1790년(정조 14)에 서호수(徐浩修)의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때 알게 된 청나라 학자 기균(紀畇) · 반정균(潘庭筠) · 이정원(李鼎元) 등과 다시 만나 교유한 내용을 싣고 있다.
또한, 훈고학의 대가로 『설문해자정의(說文解字正義)』30권을 저술한 진전(陳鱣), 『맹자해의(孟子解誼)』 · 『소이아교증(小爾雅校證)』등 많은 저술을 한 전동원(錢東垣) 등을 만나 주자서 구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학계 사정, 출판 현황, 청나라와 유구 및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문제점, 『사고전서(四庫全書)』교감 등에 대해 폭넓게 토론한 내용도 수록하였다. 특히, 그는 서지(書誌)에 대한 관심이 많아 친구들을 통해 서적을 구경하거나 구입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많은 서적을 구입하였다.
또 권말에는 사행 중에 만난 학자 · 문인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심양서원(瀋陽書院)의 제생(諸生)이 13인, 연경(燕京)의 진신(搢紳) · 거인(擧人) · 효렴(孝廉) · 포의(布衣)가 41인으로 모두 54인이었으며, 유구국 사신은 4인이었다.
이 책은 당시 국제간의 학술 교류 관계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