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연암집(燕巖集)』 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에 실려 있다. 작자가 안의현감(安義縣監)에 재직하던 때인 1793년(정조 17) 이후에 쓴 것으로 풍자성을 지닌 열전체(列傳體)의 변체(變體)이다.
통인(通引) 박상효(朴相孝)의 조카딸인 박씨는 대대로 현리(縣吏)를 지낸 하찮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릴 때부터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효도가 극진하였다. 19세에 함양의 아전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갔다. 술증이 본디 병이 있어 성례한 지 반년이 못 되어 죽었다.
박씨는 예를 다하여 초상을 치른 뒤에 며느리의 도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다가 남편의 대상(大祥)날에 약을 먹고 죽었다. 박씨는 정혼한 뒤에 술증의 병이 깊음을 알았으나 성혼을 하였다. 초례를 치렀을 뿐 끝내 빈 옷만 지킨 셈이었다.
박지원은 박씨가 젊은 과부로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문다면 친척들의 연민을 받고 또 이웃사람들의 망령된 생각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상기(喪期)가 끝날 때를 기다려 지아비가 죽은 그날 그 시각에 죽음으로써 그 처음의 뜻을 이룬 점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이 글을 쓴 동기는 박씨의 열(烈)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 등 3명이 「박씨전」을 썼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박씨와 같은 행위를 두고 열을 지키기에 얼마나 피눈물나는 극기(克己)가 필요한가를 그 반대의 경우를 들어 그 지나침을 풍자한 것이다.
개가한 이의 자손을 정직(正職)에 서용하지 말라고 한 국전(國典)은 서민을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귀천을 막론하고 과부로 절개를 지킴은 물론, 나아가 농가 · 위항(委巷 : 여염)의 여인들까지 더러더러 물불에 몸을 던지고 독약을 먹고 목을 매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박지원은 일찍 과부가 된 한 여인이 깊은 고독과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동전(銅錢)을 굴리면서 아들 형제를 입신시킨 이야기를 삽화로 넣어 수절의 어려움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넘긴 이야말로 진정한 열녀라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박씨의 순절을 완곡히 비판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만연하는 사회풍조, 나아가 과부의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제도에까지 비판이 확대되고 있는 이 작품은, 삽화를 넣으면서 설명과 문답으로 간결하고 실감있게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