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창(榮山倉)은 조선 초기 전국에 설치, 운영되었던 9개의 조창 중 한 곳이다. 전라도 나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稅穀)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영산창은 전라도 나주(羅州) 영산강 본류 연안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고려 말기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에 나와 살던 옛 영산현(榮山縣) 지역에 해당한다.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삼영동 일대로, 현재도 삼영동 택촌마을 뒷편 구릉에는 영산창성(榮山倉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산창성은 고려 말기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냈던 노숭(盧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축조 기법 등을 통해 볼 때 이미 삼국시대부터 축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영산창이 있던 나주에는 고려시대에도 해릉창(海陵倉)이라는 조창이 운영되고 있었다. 해릉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영산창과 동일하거나 가까운 곳으로 비정되고 있어, 영산강이 위치한 나주 지역은 고려시대 이래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조운제도 운영에 있어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영산창은 나주, 순천, 강진, 광산, 진도, 낙안, 광양, 화순, 남평, 동복, 흥양, 무안, 능성, 영암, 보성, 장흥, 해남 등 전라도 17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였다가 조운선으로 경창에 운반하였다. 현재의 전라남도 중부와 남부 지역이 영산창의 수세(收稅) 구역에 해당하였다. 영산창에 배치된 조운선의 숫자는 53척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소속되었다. 수운판관이 종5품의 무록관(無祿官)이었으므로, 해운판관 역시 동일할 것으로 여겨진다. 해운판관은 영산창 등 전라도 조창에서의 세곡 조운을 감독하였다.
1512년(중종 7)에 영산창이 폐쇄되고 영산창의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法聖浦倉)에 통합되었다. 영산창의 폐쇄 이유는 해로의 험난함을 피하고자 함이 주된 이유였다. 즉 육상 운송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더라도, 칠산(七山) 바다와 같은 험난한 해로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해난 사고로 인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창의 폐쇄 이후 영산강 수계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끝내 조창이 복구되지 못했다.
영산창은 『경국대전』에 기록된 조선 전기 전국 9조창 중 하나로서, 전라도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영산강 수계에 위치한 영산창은 고려시대 13조창 중 한 곳인 해릉창의 역할을 계승하였다. 고려시대 해릉창은 조선시대에 영산창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으나, 1512년 영산창이 폐쇄되고 그 기능이 영광 법성창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영산강 수계에는 더 이상 조창이 설치, 운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