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성창(得成倉)은 1390년(공양왕 2)부터 1428년(세종 10), 그리고 1487년(성종 18)부터 1512년(중종 7)까지 존재했던 조창이다.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금강 수계의 조창으로는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성산면 지역의 금강 하구에 위치했던 진성창(鎭成倉)이 있었다. 그러나 진성창은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 등으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진성창을 대신하여 1390년(공양왕 2)에 진성창보다 약간 상류 지역에 축조한 새로운 조창이 득성창이다. 당시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재직하던 노숭(盧嵩)은 무너진 조운제도를 복원하고자 전주의 경계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나주의 경계에서는 나주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조창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조창을 보호하고자 방어를 위한 성곽도 축조하였다. 득성창이라는 이름은 1417년(태종 17)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설치된 득성창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와 창리 지역으로 비정된다.
1428년(세종 10) 용안 진포의 득성창은 함열의 피포(皮浦)로 이동하고 덕성창(德城倉 혹은 德成倉)으로 개명하였다. 용안 지역에 물길이 변화하여 득성창의 운영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길이 변하게 된 이유는 홍수에 따른 범람이나 토사의 축적 등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487년(성종 18) 함열 피포의 덕성창은 용안의 금두포(金頭浦)로 이전하고 명칭도 다시 득성창으로 환원되었다. 금두포는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용안면 난포리에 해당하며, 금강의 지천인 중신천이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점과 접해 있다. 최초 설치되었던 득성창보다는 약 5 ㎞ 정도 하류에 위치한다. 그러나 1512년(중종 7) 용안의 득성창은 폐쇄되고 옥구 군산포에 새로 지어진 군산창(群山倉)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15세기 후반 득성창에 전세를 납부하는 고을은 전주, 함열, 임실, 남원, 임피, 김제, 장수, 금구, 운봉, 익산, 만경, 여산, 금산, 진산, 태인, 용안, 옥구, 진안, 고산, 무주 등 20곳에 달하였다.
용안 진포의 득성창은 고려시대 진성창을 대신하여 1390년 금강 수계의 유일한 조창으로 설치되었으나, 물길의 변화로 인해 1428년 함열 피포의 덕성창으로 조창 기능이 이전되었다. 그러나 1487년에 함열 덕성창이 폐쇄되고 용안 금두포에 신설된 득성창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후 1512년 옥구 군산창의 신설로 득성창은 폐쇄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득성창이 있던 금두포와 바로 인접한 곳에 성당창(聖堂倉)이 세워져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다만 성당창은 용안 소속이 아니라 함열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