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창(德城倉 혹은 德成倉)은 1428년(세종 10)부터 1487년(성종 18)까지 전라도 함열 피포(皮浦),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웅포면 지역에 위치했다.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금강 수계의 조창이었던 임피(臨陂) 진성창(鎭城倉)을 대신하여, 1390년(공양왕 2) 전라도 용안에 득성창(得城倉)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득성창은 1428년(세종 10) 함열의 피포로 이동하여 덕성창으로 개명하였다. 물길의 변화로 인하여 득성창의 기능이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5세기 전반 덕성창에는 전주, 함열, 남원, 익산, 고부, 김제, 금산, 진산, 순창, 임피, 옥구, 만경, 부안, 정읍, 금구, 태인, 임실, 구례, 운봉, 장수, 진안, 용담, 무주, 고산, 여산, 용안 등 전라도 26개 고을의 전세(田稅)가 수납되었다. 덕성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고창 일대를 제외한 현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의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금산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덕성창에 배치된 조운선의 숫자는 63척이었다.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소속되었다. 수운판관이 종5품의 무록관(無祿官)이었으므로, 해운판관 역시 동일할 것으로 여겨진다. 해운판관은 덕성창 등 전라도 조창에서의 세곡 조운을 감독하였다.
1487년(성종 18)에 함열 피포의 덕성창은 용안의 금두포(金頭浦)로 이전하였다. 용안은 덕성창이 세워지기 전 금강 수계의 조창이었던 득성창이 있던 곳이었다. 이전 후 조창의 명칭도 득성창으로 환원하였다. 즉 용안 득성창이 1428년(세종 10) 함열 덕성창으로 변경, 이전된 지 59년 만에 다시 덕성창이 득성창으로 돌아간 것이다. 물길의 변경으로 인하여 함열 피포에 덕성창을 설치하였지만, 용안 일대가 함열 지역보다 조창을 운영하는데 좀 더 나은 입지 여건을 지녔던 까닭에, 다시 용안으로 조창을 옮긴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함열 지역에 성당창(聖堂倉)이 설치되어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당창은 용안 금두포의 득성창과 인접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덕성창의 현 위치는 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에 해당한다.
함열 덕성창은 『경국대전』에 기록된 조선 전기 전국 9조창 중 하나로서, 전라도 전주 등 전라도 26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말기 이래 금강 수계에서는 용안 득성창이 유일한 조창으로 기능하였는데, 물길의 변화로 인하여 득성창이 더이상 조창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덕성창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었다. 덕성창의 조창 기능은 1428년부터 1487년까지 59년 간 유지되다가 재설치된 용안 득성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득성창도 1512년에 폐쇄되어 그 기능은 옥구 군산창으로 넘어갔지만, 조선 후기에는 함열에 성당창이 설치되어 조창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성당창은 함열 피포의 옛 덕성창보다 용안 금두포의 옛 득성창과 인접한 지점에 위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