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전라도 함열 지역(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의 금강 수계에 설치되었던 조창.
개설
내용
성당창의 최초 설치 시기는 1656(효종 7)~1661년(현종 2)으로 추정되고 있다. 17세기 중엽 전라도 부안에서 살았던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인조 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산에 나암창(羅巖倉)이 군산창의 기능을 분담하다가,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나암창의 기능을 대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점을 볼때 17세기 중엽 성당창이 설치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설치 당시 성당창에는 14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90년(정조 14) 주교당상 정민시의 건의에 따라 적재량을 800석에서 1,000석으로 늘리면서 성당창의 조운선은 2척이 줄어든 12척이 되었다. 조선 후기 조운선에는 사공 1명과 조군 15명 등 16명이 승선하기 때문에 성당창에는 총 192명의 사공과 조군이 배치되었다. 성당창은 함열, 고산, 진산, 익산, 금산, 용담, 남원, 운봉 등 전라도 8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8곳의 고을은 성당창과 가까이 있거나 전라도 동부 내륙에 위치한 곳들이었다. 과거 득성창은 20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는 곳이었지만, 1512년 금강 하구에 군산창이 설치되었던 까닭에 조선 후기 성당창으로 전세를 납부하는 고을의 숫자는 과거 득성창이 있었을 때보다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의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의 창고 시설이 그려져 있다.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에 3채의 창고와 1채의 사창(社倉)이 표시되어 있다. 창고와 사창은 모두 세곡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그 외 성당창에 봉세청(捧稅廳)과 순풍당(順風堂), 사공청(沙工廳) 등 3채의 건물이 확인된다. 성당창의 집무소에 해당하는 성당 봉세청은 세곡을 수납하고 적재하는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순풍당은 조운선의 항해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이었으며, 사공청은 조운선을 운항하는 선원들의 항해 준비 장소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성당창에는 창마당, 줄바탕 등의 지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마당은 창고에서 선박으로 세곡을 옮길 때에 임시로 세곡을 놓아두던 곳이었으며, 줄바탕은 선박에서 사용하기 위한 밧줄을 꼬던 장소였다고 한다. 그 외 선박의 입출입을 용이하게 하는 포구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항해와 항해술
또한, 조운선은 수군진의 첨사나 만호가 호송하도록 하였으며, 담당 구간의 호송이 끝난 후에는 문서를 발급하여 증명하게 하였다. 연해읍에서 조운선을 호송할 때는 각 해변 고을의 앞 바다에 있는 암초의 위아래와 안팎에 표지목을 세우고, 수로를 잘 아는 사람을 매 선당 2, 3인씩 승선시켜 수로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교대할 때는 문서를 주어 이를 증명토록 하였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명확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과경장(過境狀)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는 각 선박의 호칭, 사공 이름을 모두 쓰고, 관인을 찍었다. 조운선의 호송은 호송리(護送吏)라고 불리는 고을의 아전들이 담당하였으며, 호송관(護送官)이라 불리는 수영의 첨사들이 총괄적인 책임을 졌다.
한편 조운선의 주요 동력은 조군들의 노동력인 노가 아니라 돛이었다. 조운선에는 15명의 조군이 승선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항상 노를 저었던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조수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돛을 활용하면서 항해하였다. 조군이 노를 저은 것은 어장의 그물 사이를 통과하거나, 바람이 약해 빨리 항해할 수 없을 때 등으로 한정되었다. 성당창을 출발한 조운선이 군산 앞바다에 도착하면 남동풍을 타고 북서쪽으로 향해 가다가 안흥량을 지나서는 다시 남서풍을 타고 북동쪽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바람이 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운항에 어려움을 겪었다.
항해 의례
변천과 현황
전라도 지역의 조창에서 세곡 운송을 관장하는 직책은 원래 해운판관(海運判官)의 역할이었지만, 해운판관은 1697년(숙종 23)에 혁파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사(都事)가 그 임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성당창의 전세 수납은 군산포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다가, 1791년(정조 15)부터는 함열현감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성당창 소속의 조운선은 원래 800석의 세곡을 싣고 경창으로의 운송을 담당하였으나, 1790년(정조 14)부터는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 1895년(고종 32) 조운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성당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전회통(大典會通)』
단행본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조선 후기의 경제』 33(탐구당, 1997)
논문
- 정요근, 「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 안길정, 「조행일록으로 본 19세기 조운의 운영실태」(『사림』 29, 수선사학회, 2008)
- 김중규, 「군산~강경의 수운(水運)과 나루터·포구의 유형」(『금강 하구의 나루터·포구와 군산·강경지역 근대 상업의 변용』, 선인, 2006)
- 吉田光男, 「李朝末期の漕倉構造と漕運作業の一例-『漕行日錄』にみる1875年の聖堂倉-」(『朝鮮學報』 113 , 朝鮮學會, 1984)
- 문경호, 「林喬鎭의 『漕行日錄』을 통해 본 1863년 聖堂倉의 漕運 實態」(『진단학보』 128, 진단학회, 2017)
- 문경호, 「『조행일록』을 통해 본 19세기 성당창 조운선의 항해술과 항해의례」(『도서문화』 51,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8)
인터넷 자료
-
기타 자료
-
주석
-
주1
: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 우리말샘
-
주2
: 고려ㆍ조선 시대에, 조선(漕船)에 승선하여 조운 활동에 종사하던 선원. 우리말샘
-
주3
: 조선 시대에, 각 관아나 궁방(宮房)에서 금전ㆍ곡식의 출납을 맡아보거나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특정 업무의 진행을 감독하고 관리하던 벼슬아치. 우리말샘
-
주4
: 조선 시대에, 각 진영에 둔 종삼품 무관 벼슬. 절도사의 아래로 병마첨절제사, 수군첨절제사가 있으며 목ㆍ부 소재지에는 목사나 부사가 겸임하였다. 우리말샘
-
주5
: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쓰는 배. 우리말샘
-
주6
: 고려ㆍ조선 시대에, 조선(漕船)에 승선하여 조운 활동에 종사하던 선원. 우리말샘
-
주7
: 배를 부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우리말샘
-
주8
: 조선 시대에, 절도사에 속한 진(鎭)에서 수군을 거느려 다스리던 군직(軍職). 건국 초에는 종사품 무관으로 임명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얼마 후 해당 지방의 수령이 겸임하게 하였다. 우리말샘
-
주9
: 밀물과 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