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곶창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이칭
이칭
공진창(貢津倉), 공세창(貢稅倉), 아산창(牙山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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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개설

공세곶창(貢稅串倉)은 공세창(貢稅倉), 공진창(貢津倉), 아산창(牙山倉)이라고도 하며,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곡(稅穀)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내용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의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그 중 아산만 지역에는 하양창(河陽倉)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 이후 조운체계가 재정비되면서 조선시대 아산만 지역에는 조창의 기능을 담당하는 3곳의 수조처(收租處)가 설정되었다. 이 3곳은 경양포(慶陽浦)와 공세곶, 그리고 범근천(犯斤川)이다. 그 중 경양포는 고려시대의 하양창이 있던 안성천의 하구에 있었고, 범근천은 삽교천 하구에 위치하였으며, 공세곶은 안성천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삽교천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공세곶과 범근천의 조창 기능은 조선 개창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공세곶의 수세(收稅) 구역으로 아산, 청주, 공주, 천안 등 충청도 17곳의 고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범근천과 경양포의 조창 기능은 오래지 않아 폐지되고, 두 곳의 수세 구역은 공세곶창으로 이전되었다. 범근천은1478년(성종 9)에 조창 기능이 폐지되었으며, 경양포 또한 비슷한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양포나 범근내포(犯斤乃浦, 범근천)가 더이상 조창으로 기능하지 않았으며, 공세곶창의 수세 구역은 서산과 홍주 등까지 추가되어 충청도의 40개 고을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도 전국 9개 조창 중 공세곶창만이 아산만 지역의 유일한 조창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는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해운판관은 공세곶창 등 서해안 일대에 위치한 조창에서의 세곡 조운을 감독하였다. 수운판관이 종5품의 무록관(無祿官)이었으므로, 해운판관 역시 그와 동일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공세곶창에는 1523년(중종 18)에 23칸의 창고 건물이 세워졌다.

변천과 현황

조선 후기에는 공세곶창이나 공세창 대신 공진창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공진창의 전세 수납과 운반의 임무를 관장하던 해운판관은 1697년(숙종 23)에 혁파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사(都事)가 그 임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에는 아산현감이 그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조창을 통한 세곡의 운반 대신, 각 고을별로 지토선(地土船)에 의한 세곡 임운(賃運)의 비중이 늘어나고, 내륙 산간에서는 면포(綿布)로 전세를 상납하는 지역이 많아지면서, 공진창의 수세 구역은 과거보다 축소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조선 후기 공진창의 수세 구역은 아산, 목천, 연기, 천안, 온양, 전의, 청주 등 7개 고을로 감소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 후기에는 공진창에 소속된 조운선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1788년(정조 12)에는 공진창 소속 조운선이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진창의 조운선에 실을 수 있는 세곡의 양은 800석을 한도로 하였다.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공진창의 수세 구역 7개 고을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공진창의 조창 기능은 당시까지도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공진창의 조창 기능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에 따르면 아산창, 즉 공진창을 폐쇄하고 공진창에 배치한 조운선 15척도 모두 혁폐했다고 한다.

공진창은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일원이며, 1621년(광해군 13)에는 조창을 둘러싸는 성곽인 공진창성을 축조하였다. 이때 쌓은 성곽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1895년에는 옛 조창의 자리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현재도 공진창의 자리에는 공세리성당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토선에 의한 세곡 임운의 비중이 증가하고 면포로 전세를 상납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조창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 중반 경에 조창 기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아산만 지역의 대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 전근대 교통사』(고동환, 들녘, 2015)
『한국사: 조선 후기의 경제』 33(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7)
『한국사: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24(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4)
『조선후기 선운업사(船運業史)연구』(최완기, 일조각, 1989)
「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정요근,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조선시대 아산 공진창(貢津倉)의 설치와 운영」(최완기, 『전농사론』 7,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2001)
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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