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아상입지 ()

조선시대사
제도
지방 행정단위 간에 경계선의 굴곡이 심하여, 영역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로 행정 경계가 편성된 지역.
이칭
이칭
두입지(斗入地)
정의
지방 행정단위 간에 경계선의 굴곡이 심하여, 영역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로 행정 경계가 편성된 지역.
개설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두입지(斗入地)]는 군현(郡縣) 간의 경계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굴곡이 심한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견아상입지의 존재는 산과 골짜기가 구불구불한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과 관계가 깊다. 또한 견아상입지의 발생과 존속은 삼국시대 이래 지방 행정 단위 사이에 인구나 물산, 세력의 편차가 컸던 점에도 기인하는 면이 있다. 인구가 많거나 세력이 강한 군현의 영역이 약소한 소규모 군현 쪽으로 견아상입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견아상입지는 엄밀하게 객관화된 개념이 아닌 까닭에, 보는 관점이나 시대에 따라 어떤 지역을 견아상입지로 보기도 하고 아닌 곳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견아상입지를 기재한 옛 기록으로는 조선 초기에 발행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상도 지리지』, 그리고 1906년에 공포된 「대한제국 칙령 49호」가 대표적이다.

전근대시기에는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이 진행될 때 견아상입지가 함께 정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정해진 경계선을 바꾸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가급적 견아상입지의 경계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시대 견아상입지의 보다 정확한 면적과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구총수』와 같은 조선시대 지명 자료,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지명 자료들을 분석해야 한다. 근대 이후에는 과거보다 견아상입지가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대에도 다양한 원인과 필요에 의해서 여전히 견아상입지적 입지를 지닌 곳들이 존재하고 있다.

내용

견아상입지는 군현 간의 경계가 마치 개의 이빨이 위 아래로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두입지라고도 한다. 두입지는 군현 간의 경계가 북두칠성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비입지(飛入地, 월경지)와 두입지를 정리하여 부근의 군(郡)에 이속시키는 지방 행정구역의 정비를 단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1906년(광무 10) 9월 28일 「칙령 제49호」(이하 칙령 49호로 표기)에 잘 나타나 있다. 칙령 49호에서는 “비입지는 갑군토가 월재을군한 자를 위함이니, 잉속토재군하며, 두입지는 병군토가 침입정군한 자를 위함이니 이속부근군함이라(飛入地는 甲郡土가 越在乙郡ᄒᆞᆫ 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仍屬土在郡ᄒᆞ며, 斗入地ᄂᆞᆫ 丙郡土가 侵入丁郡ᄒᆞᆫ 者ᄅᆞᆯ 謂ᄒᆞᆷ이니 移屬附近郡ᄒᆞᆷ이라)”고 표현하였다. 비입지는 월경지(越境地)를 뜻하며, 두입지는 견아상입지를 의미한다.

견아상입지의 형성은 한반도의 자연 지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로부터 군현의 경계는 산줄기나 강줄기를 따라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산줄기의 경우, 자연지리적 경계로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인간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주요한 자연 경계로 기능하였다. 한반도의 산줄기는 구불구불한 지형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견아상입지가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큰 군현과 작은 군현 사이의 세력 불균형은 견아상입지 형성의 주요한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대체로 큰 군현의 영역이 작은 군현의 영역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는 형태의 견아상입지가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왕조의 개창 초기부터 중앙정부에서 견아상입지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시행하였다. 즉 견아상입지나 월경지와 같은 지역의 군현간 경계선을 조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국가적 필요가 시급한 경우에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하여 경계선을 조정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역 사회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까닭에 중앙정부에서 무리하게 경계의 조정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조선 초기에 존재하던 견아상입지나 월경지가 조선 후기까지도 별다른 변화 없이 존속하였던 주요 이유가 되었다.

한국사 속에 존재했던 견아상입지의 전국적 분포를 정리한 자료로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1906년에 공포된 「칙령 제49호」이다. 두 자료는 각각 조선 초기와 후기의 견아상입지 분포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 견아상입지의 경우, 정확한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곳들이 많다는 한계가 있다. 한편 『경상도지리지』도 조선 초기 견아상입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으나, 경상도 지역만 수록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조선시대 개별 견아상입지의 정확한 영역적 범위와 현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후기에 발행된 지명 자료인 『호구총수』나, 일제 강점기의 자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과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이 보다 유용한 자료가 된다. 다만 이 자료들은 견아상입지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각 지역의 지명만 나열한 자료인 만큼, 각 지명의 현 위치를 고증하여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다.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 편찬된 고지도류의 경우, 경계선에 대한 정밀도가 떨어지는 까닭에 견아상입지의 면모를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1906년 「칙령 제49호」에 기록된 두입지 역시 주관적 판단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경기도의 사례를 예로 들면, 견아상입지로서 이웃 고을에 편입된 경우가 10곳(편의상 이웃 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된 곳은 포함하고, 경기도에서 타 도로 편입된 곳은 제외)이 있다. 10곳의 견아상입지는 포천으로 편입된 양주 산내면, 마전(실제는 연천)으로 편입된 철원 관인면, 마전으로 편입된 장단 장동면, 장단으로 편입된 개성 2개 면(대남면·소남면), 적성(실제는 고양)으로 편입된 양주 신혈면, 안산으로 편입된 광주 3개 면(성곶면·월곡면·북방면), 남양으로 편입된 수원 6개 면(팔탄면·분향면·장안면·초장면·압정면·오정면), 진위로 편입된 수원 오타면과 양성소고니면, 그리고 여주로 편입된 원주 2개 면(강천면·지내면) 등이다.

그런데 이상 10곳 중 양성 소고니면은 월경지에 해당하며, 나머지 9곳 중에서도 엄밀하게 견아상입의 입지를 가진 경우는, 광주 3개 면과 양주 신혈면 2곳에 지나지 않는다. 즉 「칙령 제49호」에 두입지(견아상입지)라고 표현한 곳들은 실제 두입지라기보다는 관할 영역이 넓은 대읍의 소속 영역을 이웃한 소읍으로 이속시킨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1906년의 지방 행정단위의 영역 조정은 소읍의 관할 영역을 넓히고 지방 행정단위 간 존재했던 관할 면적의 불균형을 완화하려는 것에 주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견아상입지를 소멸시키는 것에 주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칙령 제49호」의 공포 이후에도, 개성 동면이나 광주 왕륜면·의곡면, 양지 고북면·고서면·고동면·목악면 등 경기도 지역의 대표적인 견아상입지는 소속 관계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견아상입지로 남아 있었다. 경기도 이외 타 지역의 상황도 경기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과 현황

1906년 「칙령 제49호」 발표 이후에도 견아상입지로 남아 있었던 개성 동면, 광주 왕륜면·의곡면, 양지 고북면·고서면·고동면·목악면 등은 1914년 지방 행정구역의 대대적인 통폐합을 통해 견아상입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14년의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을 통하여 개별 군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에, 군 규모에서는 견아상입지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상 면 단위 규모의 견아상입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리 단위에서는 훨씬 더 많은 견아상입지가 분포하였다.

해방 이후 급속하게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발달과 도시화의 진전은 지형에 따른 자연적 경계의 구분을 상당히 완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몇몇 지역 행정단위에서는 견아상입지의 입지를 가진 곳들이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로나 철도와 같은 교통수단의 건설이 오히려 견아상입지를 존속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현대의 견아상입지로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곳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둑실동,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전라북도 완주군의 상관면과 구이면,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전근대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견아상입지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녔다. 무엇보다도 견아상입지의 발생과 존속은 산줄기와 골짜기가 깊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확인되는 지방 행정단위 간 인구와 물산, 세력의 불균형은 견아상입지를 새롭게 발생시키거나 오랫동안 유지하게 하는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그런데 견아상입지는 분명하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지정되는 개념은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견아상입지를 정의하는 기준은 달라지기도 하였다. 월경지를 견아상입지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견아상입지로 보기 어려운 곳들도 필요에 의해 견아상입지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1906년 「칙령 제49호」의 사례를 보더라도, 지방 행정단위 간 영역 재조정이라는 행정적 필요가 두입지(견아상입지)의 지칭 기준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도 견아상입지의 사례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호구총수(戶口總數)』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朝鮮總督府, 1912)
『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越智唯七, 中央市場, 1917)
『한국중세사회사연구』(이수건, 일조각, 1984)
「하삼도 지역의 분석을 통해서 본 월경지의 발생과 지속, 그리고 변동」, 『고려 역사상의 탐색』(정요근, 집문당, 2017)
「고려~조선시대 낙동강 상류 지역의 월경지 분석」(정요근, 『한국문화』 71,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2015)
「GIS 기법의 활용을 통한 조선후기 월경지의 복원」(정요근, 『역사학보』 224, 역사학회, 2014)
「고려·조선시대의 ‘비입(월경)지(飛入(越境)地)’: 조선시대 전주부의 ‘비입지’를 중심으로」(최병운, 『전라문화연구』 1, 전주: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79)
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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