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基). 1986년 전라남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영암 · 목포 · 도갑사가 갈라지는 동구림리삼거리에서 도갑사 방향 오른쪽 400∼500m 거리, 속칭 소전머리〔牛市場〕 대나무밭 옆에 있다.
이 황장생은 가까운 죽정리국장생(竹亭里國長生)과 마찬가지로 사각석비형(四角石碑形)의 입석 장생이다. 크기는 높이 105∼120cm, 너비 67cm, 두께 22∼66cm이다. 전면에는 가로 20∼27cm, 세로 18∼20cm 크기의 ‘皇長生(황장생)’ 3자만이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오랜 풍우로 인하여 마멸되었는지 모르지만 국장생에서처럼 주변에 다른 문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장생은 인근의 죽정리국장생, 서구림리 메밀방죽 옆에 있는 ‘□長生(□장생)’과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 “도갑사 사하동(寺下洞) 입구에 두개의 입석이 있는데, 각각 ‘國長生(국장생)’과 ‘皇長生(황장생)’ 3자가 새겨져 있다.”는 기록과, 국장생 하부에 새겨진 ‘石標四坐(석표사좌)’라는 글씨내용에서 바로 4좌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황장생이나 국장생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長生(장생)’이라는 표기는 신라와 고려 전기에 사용되었고, 고려말 이후 조선조에는 ‘長嶠(장생)’이라는 표기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미루어 황장생의 건립시기는 고려 전기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황장생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큰 초가집 터 장독대 옆에 있었고,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촛불을 켜놓고 술을 올려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구전내용을 통해보면 약간의 위치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찰장승이 민간신앙과 결부되는 현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