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족보는 조선 후기 문신 남자(南磁)가 1680년에 편찬하고, 1712년 안동의 남흥재사에서 3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체제는 서문, 영양남씨선대가고문자, 범례, 보도, 발문, 문중완의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는 8층 횡간으로 되어 있고,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가 매겨져 있다. 권1에는 군보로부터 14세손까지, 권2와 권3에는 14세손에서 18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 따르면, 남융달이 족보 편찬에 착수하여, 그의 아들 남자가 1680년 경에 편찬을 완료했다. 이후 약 30년이 지난 1712년에 자손과 동종들에 의해 안동에서 간행되었다.
분량은 3권 1책이며, 판종은 목판본이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영양남씨족보’이다.
크기는 가로 25.2cm×세로 34.7cm이며, 유계(有界), 서발문은 항자수부정(行字數不定), 주쌍행(註雙行)이고, 반곽 가로 21.2cm×세로 28.8cm이며,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서문(序文), 영양남씨선대가고문자(英陽南氏先代可考文字), 범례(凡例), 보도(譜圖), 발문(跋文), 문중완의(門中完議)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622년(광해군 14) 남융달(南隆達)의 서문, 1680년 남자(南磁)의 서문, 1712년 안연석(安鍊石)의 서문 등 모두 3종이다. 이들 서문에 따르면, 영양남씨는 광해군연간에 남현(南俔) 등이 의령남씨족보를 간행하자 여기에 자극되어 남융달을 중심으로 족보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완료하지 못했다.
이에 그의 아들 남자가 이를 계승하여 1680년 경에는 편찬을 완료하였으나 역시 간행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이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712년에 자손과 동종들에 의해 안동에서 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영양남씨임진보(壬辰譜)로서 체제와 내용은 이미 숙종 초년에 완성되었고, 간행만 숙종 후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양남씨선대가고문자는 다른 족보의 부록과 유사한 것으로 묘지명, 호적, 묘표음기 등을 수록한 것이다. 이 중 남민생(南敏生)의 안동부 호적(戶籍:1390), 남팔개(南八凱) · 남팔준(南八俊) · 남의종(南懿宗)의 안동부 호적(1486), 남혁(南奕)의 외손 풍산유씨 유식(柳湜) 집안의 호적류 등은 세계 상정(詳正)의 근거자료로 제시된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외 묘지 · 음기는 남휘주(南暉珠:典理判書), 남민생(贈戶叅), 남의원(南義元:樂安軍需), 남융달 등의 사적(事蹟)이다.
범례는 모두 20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족보에 비해 매우 세분된 형태를 보이는 것은 세계 상정에 대한 조항들이 부언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족보는 가문의식 또는 동종의식의 결정체로서 영양남씨족보를 편찬한다는 일차적인 목적 외에 남씨 전반의 세계를 바로 잡으려는 세계변정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의령남씨족보의 상대(上代) 세계였다. 범례에 따르면, 남선(南銑:1582-1654) 등이 의령남씨족보를 편찬하면서 시조 남민의 8세손 홍보(洪甫) · 군보(君甫) · 광보(匡甫) 3형제 대에서 각기 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로 분관되었다고 기술하였다고 한다. 실제 1693년(숙종 19) 남익훈(南益薰)이 간행한 의령남씨족보에도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남자(南磁) 등은 군보의 분봉(分封) 사실과 의령남씨 초조설(初祖說) 부정하는 한편 각종 자료를 토대로 독자적인 상대 세계를 제시하였다. 전술한 대로 상당수의 호적 자료를 제시하고 범례의 대부분이 세계 변정에 대한 항목으로 설정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참고로 의령남씨족보가 시조 이래로 별다른 실전없이 세계가 구성된 반면 이 족보에서는 시조에서 손자 익(翼)까지 3대는 세계가 분명하지만 문제가 된 홍보 · 군보 · 군용(君用: 일명 匡甫)는 익(翼)의 후손으로 표기되어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홍보의 주기(註記)에서는 “홍보가 영양을 본관으로 하였다”는 의령남씨 측의 주장을 오류로 규정하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족보에서는 영양남씨 역시 군보의 후손으로 되어 있어 의령남씨족보와 상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양남씨와 의령남씨 모두 군보의 자손이라는데 문제의 주안점이 있다.
따라서 이 족보는 17세기 후반 남씨 전반의 세계(世系) 인식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이 시기에 간행된 의령남씨족보와 상호 대비해 볼 필요성이 많다
형태적으로 보도는 8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가 매겨져 있다. 권1에는 군보로부터 14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는데, 군보의 5세손 휘주(暉珠)의 장자 민생(敏生)→부량(富良) · 수량(遂良) · 황재(黃載:사위) · 배남(裴楠:사위) · 의량(義良) · 우량(佑良) · 보량(普良)계열, 차자 약생(約生)→이담(李儋:사위)계열, 장녀와 혼인한 사위 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권2와 권3에는 14세손에서 18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는데, 전자에는 부량 · 수량의 후손, 후자에는 의량 · 우량의 후손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종은 성을 표기하지 않고 외손만 성을 표기한다거나 외손은 2대에 한하여 수록하는 등 표기와 외손 수록 범위에 있어서는 이 시기 다른 족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방식으로 수록하였고, 사위와 외손은 기본적으로 과거 또는 관직만 약기하되 현달한 인물은 관직, 증직, 사승관계, 별호, 배향서원까지 기록한 예도 있다.
계후한 경우에는 이름 위에 계(繼)라 표기하고, 서자녀는 자녀 항의 맨 마지막에 수록하고 측자(側子) 또는 측녀(側女)라 표기하여 출계와 적서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각 인물의 주기는 비교적 간단하여 자, 생졸년, 묘소위치, 배위사항을 기본으로 하여 현달한 인물은 과거, 관직, 사승관계가 추기되어 있다.
발문은 1681년(숙종 7) 남씨의 외손인 이유장(李惟樟)이 지은 것이며, 문중완의는 1712년 족보 간행 당시 남천호 등 20인이 선대 묘전(墓田)의 관리를 협약한 내용으로 이를 명문화시키려는 취지에서 족보의 말미에 첨부한 것이다. 이 족보는 안동의 영양남씨들이 간행한 초간본 족보로서 남씨 전반의 세계(世系)에 대한 의문과 논변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