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고려시대에 충청도 서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양광도(楊廣道) 부성(현 서산) · 홍주(현 홍성) 및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현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창개 혹은 창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으며, 근래까지도 옛 창고와 관련된 유물들이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태안반도 지역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충청도 서부 지역에서 산출되었던 세곡의 경창 운송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창이었다.
정의
고려시대에 충청도 서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개설
내용
영풍창 지역은 고려시대 이래 수 차례에 걸쳐 굴착이 시도되었던 굴포운하의 북쪽 어귀에 해당한다. 굴포운하의 개착은 해난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였던 태안반도 앞바다의 안흥량(安興梁)을 피해나가기 위해서였다. 1134년(인종 12) 최초의 시도 이래, 1154년(의종 8), 1391년(공양왕 3), 1412년(조선 태종 12) 등 몇 차례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1461년(세조 7)에도 운하를 뚫고자 하는 검토가 있었다. 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암반이 단단하여 끝내 운하의 굴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풍창의 위치가 태안반도 북쪽 가로림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점 역시 현재의 홍성이나 서산 등지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는 데에 있어서 안흥량의 험난함을 피하도록 하는 것에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영풍창이 위치한 곳은 어은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가로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이었다. 현재는 솔감저수지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이 농경지로 개간되어 있어 조창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창개 혹은 창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등 영풍창의 흔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근래까지도 옛 창고와 관련된 유물들이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정종(靖宗) 때(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의 숫자를 정하면서, 영풍창에는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을 두었다고 한다. 영풍창에 모인 세곡은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영풍창을 비롯한 13조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조창을 드나드는 세곡의 보관 및 운송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며, 13조창에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다. 인종 때(1122~1146)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변천과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문경호, 혜안, 2014)
-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한정훈, 혜안, 2013)
- 『한국사: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14(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3)
- 「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정요근,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 「고려~조선시대 태안반도 조운의 실태와 운하 굴착」(곽호제, 『지방사와 지방문화』 12-1, 역사문화학회, 2009)
- 「서산·태안 지역의 조운(漕運) 관련 유적과 고려 영풍조운(永豊漕運)」(윤용혁, 『백제연구』 22,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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