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승려 영해 약탄의 시집으로서, 총 120수의 시가 실려 있다. 1801년에 제자인 와월 교평(臥月敎萍)에 의해 간행되었다. 승려의 시집이지만 불교의 진리나 선취(禪趣)를 드러낸 것은 많지 않고, 자연이나 사찰의 정취를 노래한 것이 많다.
묵암 최눌이 쓴 「영해대사행장(影海大師行狀)」에 권말에 묵암 최눌(默庵最訥)이 쓴 「영해대사행장(影海大師行狀)」과 와월 교평이 1801년에 쓴 영해의 제자인 풍암 세찰(1688~1767)의 행장(「풍암화상행장(風巖和尙行狀)」)이 실려 있다.
1책. 목판본. 간행지는 알 수 없다. 『한국불교전서』 제9책에 수록되어 있다.
영해 약탄은 자가 수눌(守訥)이고 속성은 김(金)씨이다. 10세에 능가사(楞伽寺)로 출가하여 18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과는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한국불교전서』 제9책에는 ‘영해대사시집초(影海大師詩集抄)’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래 3권의 문집이 있었는데, 2권이 망실되면서 시 1권만 현존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된다. 『영해대사문집(影海大師文集)』에는 오언절구 15수·칠언절구 20수·오언율시 25수·칠언율시 60수 등 120수가 실려 있다. 권두에는 양주익(梁周翊)이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와월 교평이 쓴 발문이 붙어 있다. 또 권말에는 법손인 묵암 최눌(默庵最訥)이 쓴 「영해대사행장(影海大師行狀)」이 실려 있다.
시의 내용은 크게 ‘당대의 사대부나 승려들과 교유한 시’와 ‘사찰이나 명승지를 찾아가 심회를 읊은 시’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사대부나 승려들과 교유한 시로서는 「차경성조생원운(次京城趙生員韵)」·「차양생원운(次梁生員韵)」·「근차무용대화상조계수석정운(謹次無用大和尙曹溪水石亭韵)」·「증체정사겸심환성(贈體淨師兼訊喚醒)」 등이 있다. 「근차무용대화상조계수석정운」에서 무용대화상이란 무용 수연(無用秀演, 1651∼1719)을 가리키고, 「증체정사겸심환성」에서 체정은 호암 체정(虎巖體淨, 1729∼1748)을, 환성은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을 각각 가리킨다.
사찰이나 명승지를 찾아가 자신의 심회를 읊은 시로서는 「제불대사(題佛臺寺)」·「북악초가(北嶽樵歌)」 등이 있다. 한편 「경진오월심한미이앙고유작(庚辰五月甚旱未移秧故有作)」은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모내기를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안타까워 한 시이다. 또 「정김정자(呈金正字)」에서는 올바른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본서에는 당시 불교계에서 활동했던 고승들에 관한 시가 많이 실려 있어 영해 약탄의 교우관계를 알 수 있으며,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안타까워하는 시들도 있어 저자의 애민정신을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