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토룡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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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양의 동 · 서 · 남 · 북 · 중앙단인 선농단, 양화도(楊花渡), 한강가, 북교 여단(厲壇), 종각 옆에 있었던 조선시대 토룡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린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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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옛 한양의 동 · 서 · 남 · 북 · 중앙단인 선농단, 양화도(楊花渡), 한강가, 북교 여단(厲壇), 종각 옆에 있었던 조선시대 토룡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린 제단.
내용

단의 규모는 원단(圓壇)과 같은데 사방이 정사각형으로 한변의 길이 약 7m, 높이 0.8m이며, 사방으로 층계를 두었다. 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1차로 삼각산ㆍ목멱산(木覓山)ㆍ한강, 2차로 용산강ㆍ저자도(楮子島), 3차로 풍운뇌우산천우사(風雲雷雨山川雩祀), 4차로 사직(社稷)ㆍ북교(北郊), 5차로 종묘, 6차로 다시 삼각산ㆍ목멱산ㆍ한강, 7차로 용산강ㆍ저자도, 8차로 풍운뇌우산천우사, 9차로 북교ㆍ모화관(慕華館)ㆍ동자기도(童子祈禱)를 병행하고, 10차로 사직ㆍ경회루ㆍ동기기도(童妓祈禱)를 병행하며, 11차로 종묘ㆍ춘당대(春塘臺)ㆍ동자기도를 병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12차로 오방토룡제를 지내게 된다.

오방토룡단은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5개소로, 동단은 선농단 옆에 있고, 중앙단은 종각 옆에 있으며, 서단은 양화도(楊花渡) 근처에 있고, 남단은 한강가에, 북단은 북교의 여단(厲壇) 옆에 있었다고 전한다.

토룡단의 제사는 특이한 것으로 제를 행사한 뒤 가뭄이 오래 계속되는 것은 용이 게으른 탓이라 하여 회초리를 가지고 용을 때려서 경책(警責)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1753년(영조 29) 왕명으로 교지를 내려 토룡제는 가뭄이 극에 달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쓰는 방법이나 용을 매질하는 것은 제사의 참뜻이 아니며 불손함이 심하다 하여 금지시켰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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