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동 출신. 이완용(李完用) 암살 당시 천도교인이자 대한의원부속의학교 생도였다. 1909년 여름, 이재명(李在明)이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화하려는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살해하여야 한다는 데에 뜻을 합하여, 합방협약을 끝내 체결하고 만 이완용을 살해할 거사에 가담하였다.
거사 준비에서 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과 더불어 자금조달 책임을 맡았던 까닭에 자금 주선을 위하여 천도교교리강습소를 시찰한다는 명분의 위임장을 지니고 1909년 11월말에 평양에 갔다.
그 결과 약 50원의 자금을 조달하여 거사 때 입을 학생복과 무기 등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완용암살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1910년 5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이 언도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