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년(고종 4)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동계(東界)를 수비하는 동시에 모든 군대를 지휘·통솔했으며, 뒤이어 교주방호병마사(交州防護兵馬使)를 거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그해는 거란유종(契丹遺種)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계(西北界)를 거쳐 개성 밖까지 왔다가 원주·제천을 휩쓸고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를 거쳐 동북쪽 여진(女眞) 땅으로 들어가서 다시 고려를 침범하려 하던 때로서, 동북면이 사실상 거란과 교전 상태에 있었다. 이듬해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가 되어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조충(趙冲)·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 등과 함께 다시 침입한 거란을 크게 무찌르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219년에 의주(義州)의 별장(別將) 한순(韓恂)·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러 성들이 호응하자,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가 되어 김취려와 함께 이를 진압하였다. 1222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고, 이듬해 장군 최유공(崔愈恭)·김계봉(金季鳳)·낭장 고수겸(高守謙) 등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들과 함께 문신들을 모두 제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백령진장(白翎鎭將)으로 좌천(左遷)된 뒤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