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년(다루왕 37, 탈해이사금 8) 8월에 백제가 이 곳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이동하여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니, 신라는 기병 2,000명으로 백제군을 맞아 싸워서 쫓아버렸다.
66년에는 다시 백제가 이 곳을 공격하여 빼앗고 200명에게 머물러 살면서 지키도록 하였으나 곧 다시 신라가 빼앗았다. 75년 10월에 백제가 다시 이 곳을 빼앗았으나, 이듬해 9월에 신라가 이곳을 탈환하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200여 명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의 형성시기에 있어 백제와 신라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지만 현재의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처음 백제가 이곳을 공격하였던 1년 전에 백제가 척경(拓境)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에까지 진출하고는, 신라왕의 회합을 요청하였으나 신라가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낭자곡성보다 약간 신라쪽에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낭자곡성을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에 따라 와산성은 오늘날의 보은방면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