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묘 ()

선사문화
유적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
이칭
이칭
봉황리1호분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초기국가시대
관련 국가
한나라|고구려
관련 인물
왕경
재질
벽돌
소재지
황해남도 신천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왕경묘(王卿墓)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이다. 1962년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로 쌓은 반면, 천장은 널돌로 편평하게 덮여 있는 점은 고구려 돌방무덤과 비슷한 점이 있어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 벽돌에서는 '장잠현(守長岑) 현장(縣長) 왕경(王卿)'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정의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 있는 대방군 장잠현 현장 왕경의 무덤으로 알려진 벽돌덧널무덤.
발굴경위 및 결과

왕경묘는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옛 봉황리)에 있는 벽돌덧널무덤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조영되었으며,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만경산이 자리한다. 1962년 신천군 봉황리의 새길 농업협동조합에서 진행한 건설공사 과정 중 발견되어 발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나와 있지 않다.

형태와 특징

왕경묘는 발견 당시 이미 쌓아 올린 흙은 깎여 없어진 상태였는데, 조사 결과 널길이 서쪽으로 달린 벽돌무덤이었다. 널방의 규모는 길이 310㎝, 너비 210㎝ 정도이며, 벽면은 배가 부른 형태였다.

내부에는 널받침이 놓였으며 그 위에서는 칠조각과 널못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흑칠이 된 고구려식 나무널이 안치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남북 좌우벽 중앙부의 대칭적인 위치에서 3매가 한쌍을 이루는 묘지명 전돌들이 발견되었다.

네 벽과 바닥은 벽돌을 사용한 반면에 천장은 널돌로 덮었는데, 이를 고구려 돌방무덤의 영향으로 이해하여 벽돌방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판단하는 연구자도 있다.

무덤 내부로 이르는 널길은 길이 110㎝, 너비 88㎝이다. 널길 역시 벽돌로 쌓아 올렸다. 바닥에는 5~6㎝ 정도 두께로 흙이 침전되어 있었으며, 유물들은 대체로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별도로 마련된 널받침 위에서는 나무널을 결구하는 데 사용된 쇠못이 발견되었다. 그 주변의 부장칸에서는 은제 두발장식, 청동거울, 금 · 은반지, 은팔찌, 유리구슬류, 청동띠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껴묻거리에는 부뚜막 명기(明器)도 있다.

왕경명 전돌의 명문(銘文)은 "守長岑縣王君君諱卿(수장잠현왕군군휘경) 年七十三字德彦東萊黃人也(연칠십삼자덕언동래황인야) 正始九年三月二十日壁師王德造(정시구년삼월이십일벽사왕덕조)"로 읽힌다. 이는 “장잠현장 왕군은 휘가 경이며, 나이는 73세였고, 자는 덕언이고, 동래 황현 출신의 사람이다. 정시 9년 3월 20일에 건축기사 왕덕이 이 무덤을 만들었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정시(正始)는 위나라 황제 조방(曹芳, 232274, 재위 239254)의 첫 번째 연호로 240년에서 249년까지 사용되었다. 즉 정시 9년은 248년에 해당한다. 낙랑군의 남쪽에 대방군이 설치된 지 43년이 지난 해이다. 알려진 것처럼 장잠현은 원래 낙랑군의 25현 중의 하나였는데, 205년 대방군이 설치되면서 편입된 속현이다. 그렇다면 왕경묘는 문헌 속에 등장하는 낙랑군 장잠현과 대방군 장잠현의 위치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왕경묘에서 석제 납작천장이 채용된 점은 궁륭(穹窿)의 모양을 취하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묘제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널받침 위에 흑칠된 나무널이 배치된 점도 그러하며 쇠못이 사용된 점도 일반적이지 않은데, 전형적인 낙랑과 대방 무덤에서 쇠못을 사용한 나무널의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낙랑보다는 오히려 고구려적 요소가 더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대방군수를 참칭(僭稱)하여 조영한 장무이묘(張撫夷墓)처럼 4세기 대의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할 경우 정시 9년, 즉 245년에 만들어진 문자벽돌은 선행 무덤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재이용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의의 및 평가

왕경묘는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낙랑군 장잠현의 위치 비정을 둘러싼 문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축조 시기를 둘러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논문

한인덕, 「평양일칸 무대 벽돌무덤의 년대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88)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경 왕경의 무덤 발견」(『문화유산』, 1962)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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