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덤은 대동강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으며, 조영시기는 대개 낙랑군(樂浪郡)이 존재했던 때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광묘(王光墓)라는 이름은 왕근묘(王根墓)나 왕우묘(王旴墓) 등의 예와 같이 널〔木棺〕내부에서 피장자의 성명과 신분을 알 수 있는 도장이 출토되어 붙여진 것이며, ‘정백리 제127호분’으로도 알려져 있다. 1932년조선고적연구회 제2차년도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출토유물의 대부분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봉분의 크기는 남북의 지름이 약 27m, 높이는 약 4m 내외이다. 매장주체시설인 덧널은 지표 아래에 네모진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재를 써서 축조하였다.
덧널 내에는 기둥을 세워 내부를 4분하고, 가장 넓은 남동구역에 내곽(內槨)을 설치한 뒤 부부의 널 2개를 북침(北枕)으로 해 동서로 나란히 안치하였다. ‘『’형태의 나머지 공간에는 껴묻거리〔副葬品〕을 배치하였다. 덧널의 천장 윗부분은 다시 2겹의 벽돌로 덮여져 있었다.
남자의 널인 서관(西棺)에는 관모(冠帽)·띠고리〔帶鉤〕·철검 등의 유물과 함께 2점의 나무도장이 부장되어 있었다. 1점은 양면도장으로 ‘낙랑태수연왕광지인(樂浪太守掾王光之印)’과 ‘신광(臣光)’이라는 글이 앞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다른 1점은 ‘왕광사인(王光私印)’이라고 새겨진 비뉴목인(鼻鈕木印)이다. 이 도장의 출토로 피장자의 성명과 관직 등을 알 수 있다.
여자의 것인 동관(東棺)에서는 반지·구슬·비녀 등의 장신구가 거의 완전하게 남은 사람뼈와 함께 출토되었다.
널 밖의 서쪽 구역에는 주로 칠기류가, 북쪽 구역에는 토기류와 함께 마구·무기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칠기류는 대부분이 목심칠기(木心漆器)로서 ‘왕씨뢰(王氏牢)’·‘왕대리(王大利)’·‘이왕(利王)’·‘익선(益先)’ 및 ‘번씨뢰(番氏牢)’ 등의 길상(吉祥)을 뜻하는 명문이 쓰여져 있는 것들이 있고, 이 명문에 의해 부인의 성이 번씨(番氏)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토기류에는 움무덤〔土壙墓〕의 특징적인 토기인 화분모양토기가 2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의 중요한 유물로는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연호문경(連弧文鏡) 등의 청동거울 2점과 칠기굽다리접시 및 소형의 대부동호(臺附銅壺) 등이 있다.
왕광묘에서는 노기(弩機)가 나무자루에 장착된 채 출토되어 벽화에서 확인된 실물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일산(日傘)자루와 대끝, 화장용의 솔 및 붓 등이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의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무덤은 구조와 껴묻거리의 배치 및 구성에서 석암리 194호분, 석암리 201호분 등과 유사하며 청동거울의 연대를 통해 볼 때 축조연대가 서기전 1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