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낙랑구역 석암리 일대에는 2,00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집중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은 옛 지명을 따라 ‘석암리 219호분’이라고도 불린다.
왕근묘(王根墓)라는 이름은 관 내부에서 ‘왕근신인(王根信印)’이라는 글이 새겨진 은제도장(龜鈕銀印)이 출토되어 이 무덤의 피장자가 왕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붙여진 것이다. 낙랑군(樂浪郡)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1942년 6월에서 8월까지 2개월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무덤의 봉분은 높이 약 6m, 한 변의 길이 약 24m의 절두방대형(截頭方臺形)을 이루고 있었다. 매장주체시설인 덧널은 한 변의 길이 4m, 깊이 2m의 네모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남북 길이 3.1m, 동서 길이 3.6m, 높이 약 1m의 크기로 판재와 각재를 써서 만들었다.
이 덧널과 구덩이의 벽 사이에는 적판암의 판석을 돌려 덧널시설을 보호하고 있었다. 덧널 내부에는 중앙부에 기둥을 세워 내부를 동쪽과 서쪽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의 구역에 이중구조의 널[木棺]을 머리를 북쪽으로 해 하나씩 배치한 부부 어울무덤[合葬墳]의 형태이다.
껴묻거리[副葬品]는 널 내부와 널 밖의 둘레에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의 내용으로 보아 서쪽의 널은 남자, 동쪽의 널은 여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서관(西棺)에는 앞의 은제도장과 함께 용호문(龍虎文)이 타출(打出)된 은제띠고리[銀製鉸具] 등의 장신구와 칼 등의 무기류가 있었다. 동관(東棺)에는 동제도장(鼻鈕銅印)을 비롯한 귀걸이·반지·구슬 등의 장신구가 있었다.
널 밖의 껴묻거리를 보면, 그릇류로는 ‘왕(王)’·‘왕씨(王氏)’ 등의 명문이 쓰인 칠기를 비롯해 박산로(博山爐)·편호(扁壺) 등의 동기(銅器), 화분모양토기를 이은 것으로 보이는 쇠단지[鐵壺]및 토기 등이 있다. 무기류로는 움무덤[土壙墓]등에서 보이는 동투겁창[銅矛]를 비롯한 세형동검 계통의 철제검 등이 있다.
그 밖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칠찰갑(漆札甲)과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무늬가 있는 원형의 은판(銀板)이 장식된 칠전통(漆箭筒) 등을 들 수 있다. 거마구(車馬具)로는 북방계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물무늬가 타출되고 마노옥(瑪瑙玉)이 박혀 있는 특수한 형태의 은제장식띠고리(銀製飾金具) 등이 대표적이다.
유물상의 특징은 한식(漢式)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마구 등 일부의 유물에 북방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무기류에는 세형동검 계통과 철검 등의 토착적인 유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껴묻거리와 함께 은제도장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볼 때, 태수(太守) 정도의 높은 신분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왕근묘는 석암리 52호분, 정백리 17호분, 정백동 2호분 등과 구조 및 껴묻거리의 배치면에서 유사하다. 껴묻거리의 성격 면에서는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잇는 유물들이 북방계 및 한식 유물과 혼재하고 있다. 덧널의 축조양식과 칠기 등 전한대(前漢代)의 특색을 지닌 껴묻거리의 내용으로 보아 이 무덤의 조성연대는 서기전 1세기 후반인 전한 말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