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몽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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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신착(愼屢)이 지은 한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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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신착(愼屢)이 지은 한문소설.
내용

조선 후기에 신착(愼屢)이 지은 한문소설. 1책. 한문필사본. 표제의 좌측 상단에 종서(세로글씨)로 ‘夢遊錄(몽유록)’이라 적혀 있고 우측 상단에는 ‘金烏(금오)·龍門(용문)’이 두 행으로 적혀 있다. <금생이문록 琴生異門錄>의 이본인 <금오몽유록 金烏夢遊錄>과 합철되어 있다.

<용문몽유록>의 분량은 15쪽으로 1쪽은 10행, 1행은 18자로 된 모두 2,600여 자의 작품이다. 일본 대판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에만 소장되어 있다. <용문몽유록>의 작자 신착과 작품의 내용으로 보면 저작시기는 정유재란 이후인 1600년대 중반쯤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창(居昌)·안의(安義) 지방에 널리 유포된 이야기이다. ≪거창신씨세보 居昌愼氏世譜≫·≪거창읍지≫·≪안의읍지≫ 등의 기록으로 보면 ‘황석산전투(黃石山戰鬪)’에 얽힌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전쟁과 그 이후의 처리가 잘못되었음을 작자 자신(黃溪子)의 몽중세계를 빌려 비판한 몽유록계 소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0여 년이 되었을 때에 <용문몽유록>의 주인공 황계자가 그 누이를 만나러 가다가 용문암(龍門庵)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그때 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정유재란을 당하여 황석산전투를 치르면서 죽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황석제공(黃石諸公)이라 부른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게 된 이유와 자신들의 문호(門戶 ;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쇠락한 것을 슬퍼하면서 황계자에게 자신들의 문호를 다시 세워 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에 ‘황석산싸움’이 일어났을 때에 곽준(郭逡)의 지휘로 산성을 잘 지켜나갔다.

그러나 김해부사를 지낸 백사림(白士霖)이라는 사람이 휘하에 있었을 때에 왜적의 침공에 두려움을 느낀 백사림은 밤에 그의 가족을 이끌고 성문을 나갔다. 그 순간에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안의 많은 장수와 인민이 죽게 되었다.

그 때에 죽은 곽준의 부자와 유금천(柳金川)의 부자 등도 나타나 후세의 사람들이 백사림의 행적을 공박하지 않음을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동석한 사람 중에서 백사림을 두둔하는 자는 공박을 받는다. <용문몽유록>의 전반부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후반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려 말기의 박숙선(朴淑善)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처지와 함께 산수경치에 대하여 토론을 하게 된다. 대부분 황계자의 시를 칭찬하는 내용과 그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다. 마지막으로 박숙선은 황계자를 위한 축수와 이에 대한 답례로 한 구절의 시를 남기고 꿈을 깬다. 그리고 몽 중에서 경험한 내용을 적게 되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용문몽유록>은 대부분의 몽유록계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따랐다. 작자가 명시된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정유재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계통의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작품이다. 다만, 구성면에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상호연관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반감시킨다.

<용문몽유록>은 주제면 에서도 뚜렷한 중심을 찾기가 힘들다. 전란을 맞이한 장수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면서 그 뒷처리를 담당한 위정자들의 자세에 대한 비판까지 겸하고 있다. 전쟁 그 자체와 실정(失政)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민족적 수난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몇 안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구성과 주제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용문몽유록(龍門夢遊錄)에 대하여」(강동엽, 『한국문학연구』 14, 동국대학교한국문학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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