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문화군(文化郡: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출신. 우용상(禹鏞相)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천·재령·안악·은율 등 관서일대에서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되어 일본군을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이 때 그의 휘하에는 소대장 조윤봉(趙允奉)과 경리 이진태(李振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격의 명수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황제의 선유위원(宣諭委員) 서상륜(徐相崙)이 가져온 해산을 권고하는 칙서를 보고 “황은(皇恩)이 망극하나 역적 이완용(李完用)과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서명하였으므로 역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 항전하였다.
그러나 적과 교전중 다리에 적탄을 맞아 체포, 감금되었는데, 감옥에서 감시병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 8명을 사살하고 끝까지 교전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