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문하성은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고 그 낭사(郎舍)는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맡았는데, 국초에 내의성(內議省)을 두었다가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쳤고, 1061년(문종 15)에 중서문하성으로 고쳤다.
1275년(충령왕 1)에 원나라의 영향 아래 중서문하성은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였고, 1293년(충렬왕 19)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으며,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이 국권회복정책을 쓰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었다가 뒤이어 다시 도첨의부로 고쳤으며, 1369년(공민왕 18)에 문하부(門下府)로 고쳤다.
중서문하성의 간쟁과 봉박을 맡는 낭사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 이하 헌납(獻納)·사보(思補)·헌납(獻納) 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사보는 목종 때 좌습유(左拾遺)·우습유(右拾遺)를 두었다.
1116년(예종 11)에 이를 좌정언(左正言)·우정언(右正言)으로 고치고 종6품에 정원을 각 1인으로 하였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이를 좌사보·우사보로 고치고 정6품으로 높이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이를 좌정언·우정언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