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글자는 세로 약60㎝의 크기로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 새겨져 있는데, 증(曾) · 주(朱)는 각각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와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증자는 큰 용기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르지 않으면 비록 천만의 사람이라도 두렵게 할 수 없지만,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르면 비록 천만의 사람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하겠다.”고 하였다(『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上)). 또 주희는 송나라 영종(寧宗) 초년에 권신(權臣)이던 한탁주(韓侂胄)를 논의하다가 그 일파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학문이 그릇된 위학(僞學)으로 몰렸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강학(講學)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때 측근이 학생들을 보내어 화를 피하라고 했으나 그는 “나를 깎아지른 절벽에 세울지라도 어찌 대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주자연보(朱子年譜)』 별본(別本) 영종3년(寧宗3年) 정이(丁巳) 조(條)).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여러 번 정치적 곤경을 겪었는데, 이 필적 또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큰 용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문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주희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거나, 만세의 청절(淸節)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과 주희의 글씨를 애호했다는 것도 이 각자의 의미를 더해준다. 그는 충청도 옥천 출생으로 뒤에 회덕(懷德) 등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머물렀으므로 서울에는 오래 거주하지 않았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성균관 부근)에 거처하였다. 이로 인해 그가 살던 부근을 “송동(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우암의 옛집이 송동에 있는데 석벽에 우암 글씨로 ‘曾朱壁立’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였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택(第宅)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