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송시열 관련 암각문. 필적.
내용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여러 번 정치적 곤경을 겪었는데, 이 필적 또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큰 용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문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주희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거나, 만세의 청절(淸節)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과 주희의 글씨를 애호했다는 것도 이 각자의 의미를 더해준다. 그는 충청도 옥천 출생으로 뒤에 회덕(懷德) 등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머물렀으므로 서울에는 오래 거주하지 않았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성균관 부근)에 거처하였다. 이로 인해 그가 살던 부근을 “송동(宋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우암의 옛집이 송동에 있는데 석벽에 우암 글씨로 ‘曾朱壁立’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였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택(第宅)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
참고문헌
- 『서울금석문대관』(서울특별시, 1987)
- 『서울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7)
- 『서울육백년사』인물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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