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무신 우범선(禹範善)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廣島]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 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연구 업적은 1926년 「종자(種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있는데, 초기에는 나팔꽃이나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 냈다.
그는 이어서 유채(油菜)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년「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현존종(現存種)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종의 합성’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즉,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이 연구에서 학리적으로 밝힌 점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에 수정과 보충을 가한 것이다. 즉,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945년에 발표된 「채소의 육종기술」은 그의 오랜 연구와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결론이며, 이 논문에서 말한 예언이 현재 성공적으로 대부분 실용화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뒤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국내 업적으로 큰 것을 들면,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 해결 외에 무균종서(無菌種薯)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사망 전에는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가 1959년 8월 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尹日善)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하였다. 매년 8월 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