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성운학(中國聲韻學) 또는 한어음운학(漢語音韻學)이라고도 하며, 한어(漢語)의 음운(성모 · 운모 · 성조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19세기까지는 한어를 기록하는 한자의 음(音 : 字音)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에 주로 힘써왔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중국음운학이 발달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특히 남조에서의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음(字音)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는데, 시를 지을 때 운율(韻律)에 민감하였던 남조사람들은 인도음운학의 영향을 입어서 자음의 사성(四聲)을 구분하여 의식하고, 또 한자들을 운별(韻別)로 분류, 정리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남조에서는 운 중심의 여러 운서(韻書)들이 편찬되었는데,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 육법언(陸法言) 등이 이들 여러 운서들을 집대성하여 중국운서의 대종이라고 일컬어지는 ≪절운 切韻≫(601)을 편찬하였다.
당대(唐代) 이후 ≪절운≫을 증보하거나 새로운 운서를 편찬하는 일이 계속되어 ≪당운 唐韻≫(唐) · ≪광운 廣韻≫(宋) · ≪예부운략 禮部韻略≫(宋) · ≪집운 集韻≫(宋) · ≪고금운회 古今韻會≫ 및 ≪거요 擧要≫(元) · ≪중원음운 中原音韻≫(元) · ≪홍무정운 洪武正韻≫(明) 등이 나왔다.
한편, 당나라 말기부터 북송(北宋)초에 걸쳐서 운도(韻圖)를 작성하는 등운학(等韻學)이 발달되었는데, 운도는 자음의 성(聲)을 좌우로 나열하고 운을 상하로 배열하여 이들 횡(橫)과 종(縱)으로 배열된 성과 운의 결합으로써 자음을 나타내는 도표이며, ≪운경 韻鏡≫(北宋) · ≪절운지장도 切韻指掌圖≫(南宋) · ≪황극경세성음창화도 皇極經世聲音唱和圖≫(北宋) 등이 대표적인 운도들이다.
고대로부터 중국과 접촉을 가졌던 우리 나라에 운서 · 운도 등 운학관계 서적이 일찍부터 전래되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현재로서는 어느 시대부터 전래되었는지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고려 중기부터 한시를 짓는 일이 일반교양인의 상식이 되고, 조선 태종대에는 ≪동국약운 東國略韻≫이라는 운서가 우리나라에서 간행되었다고 하며, 조선 전기에 걸쳐서 ≪예부운략≫ 등 중국운서가 여러 차례 복각(覆刻), 간행되었으니 차츰 운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세 아래 세종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운학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고, 그 보필자였던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등은 운학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무렵의 여러 문헌에는 벌써 운서와 운도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이 있고, 특히 ≪훈민정음해례≫에서는 운학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언어학적인 설명을 전개시킬 정도로 중국음운학은 훈민정음 창제 및 그 이론적인 전개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종대는 운학에 대한 관심이 큰 시기였으므로 운학 지식을 활용하여 중세국어의 음소(音素)를 분석하고, 이를 표기할 음소문자인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여 국어의 표기수단을 해결한 것이다.
동시에 중국음운학적 견지에서 볼 때 우리 나라 한자음을 바로잡아야 된다고 판단하게 되어, 우리 나라 한자음의 표준이 될 ≪동국정운≫(1447)이라는 우리 나라 운서도 편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운학연구의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송학(宋學)이론과 결부된 운학이론의 전개이고, 또 하나는 우리 나라 한자음을 위한 연구, 그리고 중국의 본토자음을 올바르게 나타내고자 하는 연구이다.
우리 나라에서 송시대의 학문, 특히 역학(易學)이론이나 성리학(性理學)이론과 결부된 운학이론이 세종대부터 꾸준히 전개된 것은 세종초에 전래된 ≪성리대전 性理大全≫의 영향이었다. ≪훈민정음해례≫에서도 음운학과 역학이론을 적절히 원용하여 훈민정음에 관한 여러 사실을 설명하였다.
역학과 음운학이 결부된 소옹(邵雍)계통의 운학연구는 중종 때의 서경덕(徐敬德)에게 이어지고, 숙종 때의 최석정(崔錫鼎) · 정제두(鄭齊斗)가 이를 이었으며, 영조 때의 신경준(申景濬)도 이 계열에 속하는 운학자였다.
우리 나라 한자음을 나타내기 위한 운학연구는 맨 먼저 1447년(세종 29)에 편찬된 ≪동국정운≫으로 나타났다. 그 뒤 우리 나라 전통한자음을 제대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1747년(영조 23)에 박성원(朴性源)이 편찬한 ≪화동정음통석운고 華東正音通釋韻考≫부터의 일이었다.
이 계통에 속하는 운서로는 1751년에 홍계희(洪啓禧)가 편찬한 ≪삼운성휘 三韻聲彙≫와 정조 때의 정약용(丁若鏞) 등이 편찬한 ≪규장전운 奎章全韻≫ 등이 있다.
중국 본토자음을 제대로 나타내보려고 편찬한 운서는 1455년(단종 3)에 완성된 ≪홍무정운역훈 洪武正韻譯訓≫과 1517년(중종 12)에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사성통해 四聲通解≫였다.
이상과 같이 중국음운학을 바탕으로 한 운서와 운도 편찬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세 갈래로 발전되어 왔는데, 19세기 후반까지 우리나라 음운학에는 중국음운학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 언어 및 문자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대개 중국음운학적인 학문 밑에서 그들의 학설을 전개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시대 여러 학자들의 업적내용이 이런 경향이었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의 학부(學部) 안에 설치되었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의 여러 위원들의 보고서에도 이러한 운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연구결과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