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가겸(可謙), 호는 청금(聽禽)·안항(顔巷). 아버지는 판관 위덕후(魏德厚)이며, 어머니는 청주김씨(淸州金氏)로 김충신(金忠信)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 그 뒤 복시(覆試)를 치르려고 상경하였으나 간배(奸輩)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별과(別科)를 설치하였다. 위정훈은 울분하여 사고(私稿)를 불태우고 복시를 치르지 않은 채 귀향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의사들과 함께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여 보조하였고, 9읍(邑)의 도유사(都有司)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웅주수(熊州守)인 중제(仲弟) 위정렬(魏廷烈)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임금을 따르라 명하고 계제(季弟)인 위정명(魏廷鳴)과 의병을 모집하여 안방준(安邦俊)과 상경하던 중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돌아갔다.
뒤에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천관산(天冠山) 아래에 집을 짓고 유유자적하게 지냈으며, 흉년을 당하자 의고(義庫)를 창설하여 많은 목숨을 구제하였다. 죽천사(竹川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청금유고(聽禽遺稿)』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