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언명(彦明), 호는 하담(荷潭). 유희정(柳希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용심(柳用諶)이다. 아버지는 유익(柳益)이며, 어머니는 이아령(利阿令) 이영손(李永孫)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6년 병조정랑을 시작으로 정언·지평·철산군수·평양서윤·호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쳤다.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무능하다고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호군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좌부승지·형조참판·경상감사를 거쳐 황해병사로 있을 때,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도둑을 잡아오자 이를 조정에 보내어 문초하였다. 그 결과 문관 김직재(金直哉)가 황혁(黃赫)과 모의해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함에 따라, 적정(賊情)을 잘 살펴 포획했다고 공신에 책봉되고 초자(超資)되어 지중추부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강변칠우(江邊七友: 박응서·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종인·박치의·허홍인 등 7명의 서자들이 소양강가에 無倫堂을 지어놓고,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던 모임 이름)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친국(親鞫: 임금이 친히 심문함)받을 때 지의금부사로 추관(推官)이 되었다.
1619년 일소회시시관(一所會試試官)으로 시관 유대건(兪大建)·이정원(李挺元)·강수(姜燧)에게 사정(私情)을 못하도록 하자, 도리어 이들로부터 참소되어 사정을 행했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또한 인목대비를 폐출하도록 상소하기도 하고 폐출할 때에 참석도 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역모자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부처되었다가,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자 연루자로 지목되어 참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이괄의 난 때 피죄인(被罪人) 중 억울하게 죽은 자가 분명한 사람을 신원하라는 교지에 따라 관작이 복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