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상감사, 황해병사,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언명(彦明)
하담(荷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0년(명종 15)
사망 연도
1624년(인조 2)
본관
문화(文化, 지금의 황해도 신천)
주요 관직
좌부승지|형조참판|경상감사|황해병사|지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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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감사, 황해병사,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언명(彦明), 호는 하담(荷潭). 유희정(柳希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용심(柳用諶)이다. 아버지는 유익(柳益)이며, 어머니는 이아령(利阿令) 이영손(李永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6년 병조정랑을 시작으로 정언·지평·철산군수·평양서윤·호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쳤다.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무능하다고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호군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좌부승지·형조참판·경상감사를 거쳐 황해병사로 있을 때,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도둑을 잡아오자 이를 조정에 보내어 문초하였다. 그 결과 문관 김직재(金直哉)가 황혁(黃赫)과 모의해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함에 따라, 적정(賊情)을 잘 살펴 포획했다고 공신에 책봉되고 초자(超資)되어 지중추부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강변칠우(江邊七友: 박응서·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종인·박치의·허홍인 등 7명의 서자들이 소양강가에 無倫堂을 지어놓고,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던 모임 이름)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친국(親鞫: 임금이 친히 심문함)받을 때 지의금부사로 추관(推官)이 되었다.

1619년 일소회시시관(一所會試試官)으로 시관 유대건(兪大建)·이정원(李挺元)·강수(姜燧)에게 사정(私情)을 못하도록 하자, 도리어 이들로부터 참소되어 사정을 행했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또한 인목대비를 폐출하도록 상소하기도 하고 폐출할 때에 참석도 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역모자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부처되었다가,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자 연루자로 지목되어 참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이괄의 난 때 피죄인(被罪人) 중 억울하게 죽은 자가 분명한 사람을 신원하라는 교지에 따라 관작이 복위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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