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평중(平仲). 유대의(兪大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희증(兪希曾)이다. 아버지는 유박(兪樸)이며, 어머니는 정취도(鄭就道)의 딸이다. 부인은 이관운(李觀運)의 딸이다.
1695년(숙종 2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99년(숙종 25)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어 경연의 허실과 구언(求言: 왕이 신하에게 정치의 득실에 대한 견해를 구함.)의 겉치레, 형벌과 포상의 어긋남, 당쟁의 폐단 등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지평·집의·장령·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을 주도하였다.
소론에 속하는 인물로서 1701년에는 장희빈(張禧嬪)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론측의 공격을 받고 있던 최석정(崔錫鼎)을 옹호하다가 해직되기도 하였다. 1708년에는 황해도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시찰하였고, 이어 사간·집의, 세자시강원보덕을 역임하였다. 1711년(숙종 37)에는 진주 사은 겸 동지사(陳奏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 때 청의 목극등(穆克登)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울 일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이후 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717년(숙종 43) 당상관에 올랐으나 노론측의 견제로 관직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자 성주목사로 나갔다가, 1722년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승지로 전보되고, 대사간,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파직되었다가 뒤에 승지로 복귀하여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영조 13) 송진명(宋眞明)의 주청으로 효자의 정려를 내리고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