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덕여(德汝). 아버지는 금산군수 유한기(兪漢紀)이다. 일찍이 김원행(金元行: 金昌協의 孫)에게 수학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었고, 1811년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그뒤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세자시강원시직·장악원주부·형조좌랑 등을 거쳤다. 외직으로 나가 증산현령이 되었는데,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군향(軍餉)을 충족시켰다.
1817년 평양부서윤에 제수되자, 기자묘(箕子廟)를 수리하고 텅빈 부고(府庫)에 20만냥을 예축하였으며, 부정한 서리(胥吏)로부터 30만냥을 환수하는 치적을 쌓았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판관, 다시 서윤으로 승임되었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하자, 낭청으로서 총호사(摠護使)가 감당하지 못하던 능의 산역(山役)을 완공시켰다. 그 뒤 사직서령(社稷署令)·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휘경원도감랑(徽慶園都監郎)·광흥창수 등을 역임하고, 1826년 이천부사를 지낸 뒤 1832년 상주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