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한 지방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留守) 등이 왕명이 없이 자의로 군사를 발동하거나 역모에 의한 동병(動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밀부(密符)의 제도가 있었다.
그 밀부는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있다. 비상의 명령이 내려지면 그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부와 왕이 보낸 반쪽의 부를 맞추어 의심할 바가 없을 때 명령대로 거행하게 된다.
조선 전기의 발병부(發兵符)는 그 형체가 둥글고 한 면에 ‘발병(發兵)’이라 쓰고, 그 뒷면에는 ‘모도관찰사(某道觀察使)’ 또는 ‘모절도사(某節度使)’라고 썼다.
그리고 여러 진(鎭)인 경우는 ‘진호(鎭號)’를 쓰고 둘로 나누어 우부(右符)는 해당 관찰사·절도사 및 진에 주고 좌부(左符)는 대내에 보관하였다.
만약 군사를 움직이려면 좌부와 함께 동병을 명한 교서를 내리게 되고, 그것을 받은 관원은 내려온 좌부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우부를 합해 틀림없음이 확인되면 교서의 명령대로 군사를 움직이게 된다.
조선 후기의 밀부의 형체는 원형인데, 한 면에는 ‘제기부(第幾符)’, 뒷면에는 ‘어압(御押)’을 표시하고 둘로 나누어 우부는 해당 관원에게 주고 좌부는 대내에 간직하였다.
동병할 일이 있을 때 합부(合符)해 간모(奸謀)를 방지하는 일은 전과 같았다. 국왕이 밀부를 관원에게 내릴 때 함께 내리는 유서는 그 관원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으로서 유서통(諭書筒)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이 문서의 서식은 『전율통보(典律通補)』에 실려 있는데, 현전하는 문서 중 1592년(선조 25)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성일(金誠一)에게 내린 유서와 1800년(정조 24) 황해도병마절도사 이성묵(李性默)에게 내린 문서는 그 문서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1596년 사도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에게 내린 유서는 그 서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유서와 밀부는 조선시대 군사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나, 다른 고문서에 비해 그 수가 적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