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유복삼(柳福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만건(柳萬健)이다. 아버지는 유사문(柳師文)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왕족 여창군(礪昌君) 이합(李柙)의 딸이다. 노론계 산림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제자이다.
1777년(정조 1)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성격이 엄격하고 꿋꿋하여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는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의 종에게 곤장을 치기도 하였고, 홍국영이 사과하였으나 대답을 하지 않아 노여움을 샀다. 이때 유성한이 데리고 온 호위병 박중근(朴重根)이 궐내에서 칼을 뽑은 일로 사형되고, 유성한은 사천현에 유배되었다.
1765년(정조 12)에 사헌부지평으로 상소하여 임금의 학문정진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수갚을 일, 사치의 폐단을 단속할 것을 주청하였다. 1791년에는 황해도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염전·둔전·군정의 폐단 등을 논하여 시정하게 하였다. 1792년에는 사간원정언으로 상소하여 제왕의 학문을 논하고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였다.
이 상소 가운데 사도세자에게 저촉되는 말이 있다 하여 성균관유생들과 사간원으로부터 성토를 당하였다. 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역적으로 몰아 국문(鞫問: 임금이 죄인을 직접 신문함.)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까지 비호하고 죄를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