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 유충관(柳忠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탱(柳樘)이다. 아버지는 유몽표(柳夢彪)이며, 어머니는 이택(李澤)의 딸이다. 부인은 채천경(蔡天經)의 딸이다.
1594년(선조 27) 성균관학생으로 있을 때 장문의 소를 올려 민심을 보존하고, 원한을 풀어주며, 수령을 가려 임용할 것 등과 상벌을 엄하게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당시 집권자들의 잘잘못을 논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8년 승문원정자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1599년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의 설서 · 사서를 역임하고 다음해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각지의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 홍문관의 부수찬 · 수찬, 장흥판관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이후 홍무관의 부교리 · 교리 · 부응교 · 응교, 사헌부의 장령 · 지평 · 집의, 사간원사간, 부호군 ·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고 1613년(광해군 5) 예조참의로 승진하였다.
이후 병조참지, 동부승지 · 대사간 · 부제학을 지내고 형조참판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북계열의 관료로서 계축옥사에도 참여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1616년(광해군 8)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예대로 치른 다음 이이첨(李爾瞻)을 처벌하도록 주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청하(淸河)로 귀양갔으나 곧은 선비라 하여 바로 방환되었고,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정구(李廷龜)와 같은 나이로 친분이 두터워 문학적 교유를 많이 하였다. 고산(高山) 삼현영당(三賢影堂)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취흘집(醉吃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