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지(認之), 호는 범애(泛愛). 아버지는 유우(柳藕)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학문에 근면하고 행의(行儀)가 단정하여 동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당대의 명사 정지연(鄭芝衍)·박응로(朴應老)·최황(崔滉) 등과 막역하게 지냈다.
1583년(선조 16)에 충효와 절의로 천거되어 우봉(牛峰)·이천(伊川)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으로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에 머무르다가 자진해서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로 제수되어 세자를 모시고 영변까지 갔다.
이듬해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되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통정대부에 승직되고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임명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