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미중(美仲). 유인(柳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경즙(柳景緝)이다. 아버지는 유사(柳瑡)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응건(閔應騫)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95년 이후 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정언을 두루 거쳤다. 소론 계열의 대간으로서 장희재(張希載)의 종 업동(業同)이 남의 호패를 훔쳐 무고한 일이 일어나자, 장희재와 세자의 보호를 힘써 주장하였다. 정언·장령을 지내면서 1697년에는 관원(특히 세자시강원의 관원) 선발에 신중하고 붕당의 폐를 혁파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후 필선·정언·헌납을 지냈다. 이 때 통제사 민함(閔涵)이 연잉군(延仍君: 뒤의 영조)에게 선물 올린 일을 탄핵하고, 과거장에서의 부정과 익명의 투서 등사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노론 중신인 이건명(李健命)·이정명(李鼎命)·좌의정 이세백(李世白) 등을 탄핵하였고, 투서로 옥사(獄事)가 성립될 수 없다며 과거 부정 문제를 넘으려하자 장령 어사휘(魚史徽)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707년(숙종 33)에는 당상관에 올라 승지가 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 좌승지로 있으면서 천재지변으로 인한 구언교서를 내리도록 건의하였다. 노론 일파의 홍문록을 둘러싼 농간을 논박하고, 소론 대신이던 조태구(趙泰耉)를 우대하고 이광좌(李光佐)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가 노론측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1721년 12월 임인옥(壬寅獄) 후 소론이 정권을 잡자 승지로 복귀하였다.
1722년 5월에는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임명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10월에 예조참판·호조참판 등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다시 승지로 옮겼다.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측으로부터 임인옥 때의 일로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과 문외출송(門外黜送: 4대문 밖으로 축출됨)에 처해졌다가 뒤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27년(영조 3) 석방되어 다음 해 정월 도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얼마 후에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