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무기와 관련되어 각 군문이 설치하고 감관(監官)을 파견해 경영하는 관영 형태의 성격을 지닌 유황의 채굴 및 조달을 맡은 광업소이다. 유황은 ‘석류황(石硫黃)’ 또는 ‘황(黃)’이라고도 하며, 의약·공업 약품·화약 원료로 쓰이는 광물이다. 조선시대 유황 광산의 채굴이 국가의 정책적인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로서, 당시 유황의 수요는 병기용(兵器用) 화약의 제조를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중 조총(鳥銃: 火繩銃이라고도 함)으로 무장한 왜병과 접전하는 과정에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제도(諸道)의 군병을 삼수(三手), 즉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 편제로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필요에 따라 경중(京中)에 설립한 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의 군사와 제도 각읍(諸道各邑)에 편성된 속오군(束伍軍)도 삼수제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삼수제라고는 하지만, 그 중심은 포수인 조총 병대로, 화약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조정에서는 화약의 제조 비용을 제도 각읍의 수령에게, 소속 지방군인 속오군에게 필요한 화약을 스스로 부담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는 민결(民結)에 부과하였다. 이때 화약가(火藥價)는 읍의 대소에 따라서 등급을 정하고 월 단위로 부과했기 때문에 이를 ‘월과화약가미(月課火藥價米)’라고 하였다. 경기도·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삼남(三南)의 연 총액은 4,029석 5두였으며, 화약 총량은 6,044근이었다.
한편, 경중의 5개 군문은 동시에 각기 자체의 경비로써 그 군문의 수용 화약을 제조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에는 화약 제조에 필요한 유황이 국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중국과 일본에서 비싸게 밀수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유황의 국내 생산을 서두르게 되어 유황광 개발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수어청이 1661년(현종 2)에 진산(珍山)에서 유황광을 처음 발견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유황광의 적극적인 개발 정책을 펴는 한편 광산을 발견, 보고하는 자에 대해서는 큰상을 내리는 시상법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활동적인 기술자들의 요행심을 자극했고, 발견자는 동시에 유황점의 실질적인 경영자인 감관(監官)으로 차정(差定)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마침내 광산 개발에 전력을 투구하는 자들이 속출함으로써 1661(현종 2)∼1712년(숙종 38) 간에 발굴한 전국의 유황 산지는 20여 곳에 이르렀다.
현종 연간에는 서울 소격서동(昭格署洞)과 단천·청주 등지가 유황 산지로 알려졌으나, 채굴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 유황 산지는 경중의 5군문이나 비변사, 지방의 병영·수영 등에서 유황점을 두어 수세하였다. 광산을 발굴한 기술자(기업가)를 감관에 차정해 그에게 화전(火田)을 절수, 역량(役糧)에 충당하게 하였다. 동시에 해당 군아문은 일정한 강제에 의해 부역 노동자인 유황군(硫黃軍)을 취역(就役)시켰으며, 유황군 한 사람당 유황 5근씩을 수취하였다.
유황감관은 군 아문이 파견한 관인적 성격을 띤 관리자였다. 그리고 유황의 채굴 및 제련상의 기술자인 황장(黃匠)은 관장(官匠)으로서 임금을 받는 기술자이고, 유황군은 군역 대신 신역을 지고 있던 부역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각 군 아문의 설점 수세하에 운영된 유황점에 취역하고 있던 점군(店軍)의 수는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군아문의 설점 수세하에 운영된 유황점은 18세기 초·중엽에 이르러서는 경향군(京鄕軍)의 광범한 수포군화(收布軍化)로 인한 화약 수요의 격감과 각읍 월과화약의 제조권이 공인(貢人)에게 이속됨으로써 설점 수세 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경영의 경험을 축적한 유황감관과 광산 인구의 대량 창출은 18세기 중엽 이후의 잠채광업(潛採鑛業) 발전의 한 소지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