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석정(石正)·소용(小用)·소룡(小龍).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 밀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주 길림(吉林)으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 뒤, 이해 10월 단원 곽재기(郭在驥)·황상규(黃尙奎)·이성우(李成宇)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3개의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6월 매일 숙소를 바꾸면서 비밀리에 거사시기와 지점을 물색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 김원봉(金元鳳)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윤세주의 최후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42년 화북(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