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교

  • 종교·철학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세자익위사세마, 서연관 등을 역임하다가 향리로 내려가 독서와 강학으로 여생을 마친 학자.
이칭
  • 숙야재(夙夜齋)
  • 숙우(叔愚), 숙정(叔正)
인물/전통 인물
  • 본관파평(坡平)
  • 사망 연도1717년(숙종 43)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세자익위사세마|서연관
  • 출생 연도1658년(효종 9)
  • 출생지서울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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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익위사세마, 서연관 등을 역임하다가 향리로 내려가 독서와 강학으로 여생을 마친 학자.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정(叔正) 또는 숙우(叔愚), 호는 숙야재(夙夜齋). 아버지는 부수찬 윤절(尹晢)이며, 어머니는 남원윤씨(南原尹氏)로 삼학사 중 한 사람인 교리 윤집(尹集)의 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배움을 싫어하여 방종하게 자랐으나, 11세 때 할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죽은 뒤 대오각성하여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경서와 사서(史書)에 정밀하였고 제자백가의 서까지 널리 공부하였으나 성리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특히 예학에 정통하여 윤증 문하의 제일인자로 인정받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벼슬을 단념하였으나 1713년(숙종 39) 56세 때 학행으로 추천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서연관으로 재직하면서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명료한 강의로 명성을 얻었고, 또 치자(治者)의 판단력 배양을 위하여 역사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세자와 시강관들이 모두 윤지교의 학문에 감복하였다. 그러나 윤지교는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향리에 돌아와 독서와 강학으로 여생을 마쳤다. 예학에 관한 문답서 1부를 편찬한 외에는 저술에 힘쓰지 않았다.

참고문헌

  • - 『일암집(一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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