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당 임씨 ( )

윤지당유고
윤지당유고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이기심성설」, 「예악설」, 『윤지당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윤지당(允摯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721년(경종 1)
사망 연도
1793년(정조 17)
본관
풍천(豊川)
출생지
미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이기심성설」, 「예악설」, 『윤지당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윤지당(允摯堂). 함흥판관 임적(任適)의 딸이며, 임성주(任聖周)의 여동생이다. 남편은 신광유(申光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총명하고 부지런해 임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사서 등을 배웠고,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전·사서(史書) 등을 강론했는데, 식견이 탁월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을 쌓아 한치도 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일생 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한 일이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윤지당임씨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했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죽은 뒤 유고 40여 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 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중국 역대 위인·영웅·학자들에 대한 인물 논평들이다.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예악설(禮樂說)」·「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오도일관설(吾道一貫說)」 등의 논문은 조선 후기 성리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대학』 7조와 『중용』 27조에 대한 경의(經義) 2편과 「논안자소락(論顔子所樂)」·「안자호학찬(顔子好學贊)」·「심잠(心箴)」·「인잠(忍箴)」·「시습잠(時習箴)」등도 경전에 대한 조예를 보여준다.

또한 예양(豫讓)·안자(顔子)·자로(子路)·가의(賈誼)·이릉(李陵)·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남겼다. 유고는 1796년(정조 20)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에 의해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1책으로 편집, 부록과 함께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녹문집(鹿門集)』
『운호집(雲湖集)』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