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일명 학승(學昇). 1919년 3·1운동 후 오동진(吳東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독립운동단체인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각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20년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임시정부산하의 광복군 참리부(參理部)와 사령부로 편성되고, 사령부 밑에 각 지방에 군영이 조직되자, 오동진과 함께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국내진공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압록강 연안에 가까운 지점인 관전현 안자구(寬甸縣安子溝)에 광복군총영이 설립되고 총영장에 제2영장 오동진이 취임함에 따라 광복군총영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이 중국을 거쳐 내한하게 되자, 이 기회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총영장 오동진과 협의, 3개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신의주역·선천군청·선천경찰서·평안남도청을 폭파하도록 하여 평안남도경찰국과 선천경찰서에 대한 폭탄투척이 성공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3년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국의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1926년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는 잔칫집에서 일본의 패전을 강조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