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 2권. 1938년 그의 증손인 주룡(周龍)이 소장한 원본을 기초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등사하였다.
해방 후 195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등사본을 토대로 어윤중(魚允中)의 종정연표(從政年表)와 합본하여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6권으로 출판하였으며, 1971년탐구당(探求堂)에서 번각, 발행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에는 구두를 찍고 인물의 호·자 및 연대의 간지(干支)에 각각 적당한 방주(傍註)를 기입하고 두주(頭註)를 표시하였다.
『속음청사(續陰晴史)』 제1권 첫머리의 기록에 의하면, 본래 1865년(고종 2) 12월말 음관으로 출사하던 날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주룡 소장 원본은 1881년 9월 1일 이후의 부분만 남아 있다.
내용은 1881년 9월 1일부터 1883년 8월 25일까지 순천부사 재임 중에 영선사(領選使)로 임명되어 상경한 다음 학도(學徒)·공장(工匠)의 선발을 비롯한 사행에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1882년 11월 21일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던 잔류 학도·공장 등을 영솔하고 귀국한 뒤 강화유수로 부임하는 데까지가 본 기록이고, 그 후는 월별 중요 안건에 대한 비망록으로 그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죽음과 산역(山役)에서 끝을 맺었다.
책에는 군사기계제조를 배우는 일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체결을 위한 사전교섭, 1882년 임오군변이 발생 당시 청나라측의 개입진상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런 문제들을 밝히는 근본사료가 된다.
그러나 임오군변의 소식이 전해진 뒤의 청군(淸軍) 개입문제, 특히 흥선대원군의 난의 괴수설 및 그에 대한 납치·구금의 방략에 관한 기록을 청나라측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개작(改作)의 흔적이 있으므로 이를 사료로 이용할 때에는 엄밀한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 책의 속편으로 『속음청사』가 있으며, 『천진담초(天津談草)』는 책의 내용 가운데 담초만을 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