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관 ()

근대사
제도
조선 말기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임시로 설치된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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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말기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임시로 설치된 관직.
내용

군제이정소(軍制釐整所)·관제이정소·제실제도정리국 등에 설치되어 각각의 제도를 식민지 형태로 개정하였다. 일제는 1904년 8월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재정과 외교분야를 비롯한 주요 부분에 일본인 고문과 참여관을 임명하여 대한제국의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인 작업으로 군사제도·중앙관제를 뜯어고치는 한편, 왕실의 재산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1904년 8월 군제이정소, 10월 관제이정소와 제실제도정리국 등을 설치하여 각각의 기구에 의정관을 두었다.

장령(將領 : 장관 및 영관) 중에서 임명된 군제의정관은 12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약 한달 정도의 준비 끝에 9월 24일 원수부관제·군부관제 등 18개의 군사제도 관계법령을 개정하였다.

관제의정관은 17인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대신 및 협판(차관급)과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郎)와 궁내부 및 농상공부 고문 가토(加藤增雄)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5년 2월말 의정부관제·중추원관제 등 18개의 중앙관제를 뜯어 고쳤다.

제실제도정리국 의정관은 가토·고영희(高永喜)·박용화(朴鏞和)·김규희(金奎熙)·이근상(李根湘) 등 6인으로 구성되어, 1905년 1월 23일 활동을 시작한 뒤, 같은 해 3월 궁내부관제를 개정하였다. 그 뒤 1906년 1월 제도국으로 변경되었으나 여전히 의정관 6인을 두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의정관제도는 마치 조사·준비를 통해 근대적 제도개혁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었지만 의정관 회의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일본인 고문 메가다와 가토였다. 따라서 제도의 식민지적 개편, 왕실재산의 탈취를 도와준 것이 의정관이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제실제도정리국일기(帝室制度整理局日記)』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Ⅲ·Ⅳ·Ⅴ(송병기 외, 국회도서관,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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