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읍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목사 유여대(劉如大)에 의하여 주동되었다. 그는 민족대표로 서명에 필요한 인장 등을 이승훈(李昇薰)에게 맡기고, 서북요지인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양실중학교(養實中學校) 운동장에서 유여대의 독립선언서 낭독, 황대벽(黃大闢)의 독립에 관한 연설, 만세삼창, 학생들의 독립가제창에 이어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 때 일본헌병의 출동으로 해산이 강요되고 주동인물 10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시위운동은 계속되어 2일과 3일에는 남문 밖 광장에서 전개되었는데, 특히 3일은 고종의 국장일이므로 1,200여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4일과 6일에는 양실중학교 학생 600여명이 만세시위를 전개, 50여명이 검거되고, 3월 27일과 4월 1일에는 천도교인과 장꾼이 합세한 3,000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제측과 충돌하여, 사망 1명, 부상 2명 외에 14명이 피검되었다.
그 밖에 3월 30일 고령삭면영산장터에서는 3,000여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의 무력제지로 인하여 즉사 3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31일에는 수구진(水口鎭)과 옥강진(玉江鎭), 4월 2일에는 비현(枇峴)에서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사망 2명, 부상 11명이 나오고, 4일에는 고관면·광성면에서 각각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사망 4명, 부상 5명을 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