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이후 근대적 공장제품이 다량으로 수입됨에 따라 종전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에서 탈피하여 서구식 족답기(足踏機)를 도입, 공장공업을 발전시킨 민족기업이 서울을 중심으로 다수 출현하였을 때 낭대호(浪大鎬)가 설립하였다.
1915년 12월 현재 자본금 3,000원으로 직공 32명을 고용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또, 기계설비로 족답기 16대, 수직기(手織機) 22대를 갖추어 와사단(瓦斯緞)·한양모사(漢陽毛紗)·생목(生木)·한양목(漢陽木)·한양저(漢陽苧)·선동포(鮮絧布)·양말 등의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연생산액은 9,000원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의 직조공장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 장사동 소재 김덕창(金德昌)의 중곡염직공소(中谷染織工所), 노홍석(盧洪錫)의 경성염직소, 최규익(崔奎翼)의 한양염직공장 등이었는데, 경성직뉴주식회사와 김덕창의 공장 다음가는 자본규모와 설비로 운영되고 있었다.
다른 직조공장과 마찬가지로 제1차세계대전으로 유발된 호경기에 힘입어 어느 정도 성장이 가능하였으나 전쟁종료 후 면사가격의 불안정 및 전반적 불황으로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은 근대적 기업의 초기형태, 민족기업의 원초적 형태였으며 그 성장의 실패는 초기민족자본 형성의 좌절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