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흥(永興). 원(元)나라 선수천호(宣授千戶)를 지냈던 증판문하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최한기는 본래 안변군 등주(登州) 사람으로 함경도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돈을 많이 모아 큰 부자가 되었다.
의혜왕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다른 데가 많았다. 가년이 되자 부모가 김린(金麟)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녀가 말을 듣지 아니하자 가재(家財)를 반으로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슬피 울면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인연이 있는데 어찌 뜻밖에 김린의 아들에게 시집갈 수 있겠는가. 배필이 곧 이를 것이다.”라고 거절하였다.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 李子春)가 볼 일이 있어 최한기의 집에 갔는데, 그때 그녀가 용 두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한마리는 뱃속으로 들어가고 한마리는 뜰에 서 있는 좋은 꿈을 꾸자, 이자춘에게 청혼을 하여 시집갔다. 회임한 지 14개월 만에 이성계를 낳았다.
그녀는 생존시에는 고려국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여졌고, 조선이 개국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의비(懿妃)로 봉하여졌다. 뒤에 태종이 의혜왕후(懿惠王后)로 추봉하였고,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였다.
1471년(성종 2) 영녕전(永寧殿)에 이안하였고, 1795년(정조 19) 영흥본궁(永興本宮)에 추제(追躋)하였다. 슬하에 2남(태조 이성계와 영성대군 이천계) 1녀(정화공주)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