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霞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이구서(李龜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김오응(金五應)의 딸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참봉으로서 1813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4년 통사랑으로 임명되고, 1820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1821년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2년에 인신(印信)을 소홀히 하였다는 무고로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82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사과·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응교·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역』과 시, 고금의 역사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하계문집(霞溪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