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곡산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 중의 한 사람이다. 천도교신자로서 봉훈(奉訓)의 책임을 맡아 교세확장에 노력하던 중, 1919년 2월 7일 이종일(李鍾一)로부터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에는 천도교 총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자기의 결심을 밝히고 허락을 받았다. 이에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1,000매를 받아 황해도 서흥의 천도교구로 가서 교도 박동주(朴東周)에게 750매를 배부하여 해주와 사리원지역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겼다.
또한, 서울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니, 지방에서도 이같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연락하는 책임도 맡았다. 고향인 곡산으로 돌아와 그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3월 4일 수안 송항리에서 잡혀 1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