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기술(己述). 평안북도 자성 출신. 190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만주 유하현(柳河縣)에 설립된 독립군간부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분교를 칠도구(七道溝)에 설립, 그 분교장이 되어 독립군간부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평안북도 자성·강계·후창군 등 한만국경지방에 독립군을 파견하여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장에 취임하여 백광운(白狂雲)과 함께 임강현(臨江縣)을 근거지로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1923년 11월 사령관의 명을 받고 대원을 인솔, 국내에 진입하여 평안북도 구성산에 주둔 중 일본경찰대의 기습을 받고 교전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하였다.
1924년 6월 재차 입국하여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동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였다. 1927년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의 제6행정구위원장(第六行政區委員長)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 통림총관소 총관(通臨總管所總管) 및 강계군·자성군·후창군의 통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봄 자성군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