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좌백(左伯). 이장영(李長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관성(李觀成)이다. 아버지는 이진우(李眞遇)이며, 어머니는 김명석(金命碩)의 딸이다. 호조판서 이경직(李景稷)의 현손이다.
소론 명문 출신으로 유생 시절에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글을 가지고 윤증(尹拯)을 제사한 일 때문에 노론측의 공격을 받아,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이를 무릅쓰고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방목에서 탈락되었다.
다음해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경종 즉위 후 세자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지내면서 노론 4대신과 그 일파를 탄핵하고 논죄하였다. 홍문관의 수찬·교리, 사간원정언, 경연시독관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측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등용되자 홍문관수찬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교리·응교, 사간원정언·헌납을 거쳐, 1728년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의 진압에 힘쓴 공으로 당상관에 승진되고 승지로 제수되었다. 오랫동안 승지를 지내며 영조의 측근에 있다가, 1732년 잠깐 삼화부사로 나간 적이 있었다. 승지로 있을 때 청렴한 관원들을 추천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1734년 죄인을 추국한 문서 『사변일기(事變日記)』를 누설한 혐의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후에 서용되어 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