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악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이칭
  • 이칭광평군(廣平君)
  • 진지(鎭之)
  • 시호충장(忠壯)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진주성 전투
  • 본관광주(廣州)
  • 사망 연도1608년(선조 41)
  • 성별남성
  • 주요 관직곤양군수(昆陽郡守)|전라도병마절도사|훈련원도정|경기방어사
  • 출생 연도1557년(명종 12)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일기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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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이호약(李好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 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김시민을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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